김해김씨-나의 가계/I. 가락국 역사

I. 가락국(駕洛國) 역사

도널드 Kim 2009. 10. 20. 10:23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I. 가락국(駕洛國) 역사

 

1. 수로왕(首露王)의 탄강(誕降)과 가락국 건국

  

신화(神話)는 문자(文字)가 없었던 원시사회 시절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그 자체가 당시의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과장될 수도 있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과장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신화는 대부분 천지가 창조된 것을 바탕으로 한 개국신화(開國神話)들만 있다. 수로왕의 탄강신화 역시 김해 가락국의 개국신화이다.

수로왕의 탄강신화인 가락국의 개국신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1075~1084년 사이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기록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적 전통을 가진 고대 문명국이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한강(漢江) 북쪽은 단군의 고조선(古朝鮮: B.C. 2333)을 이어서 부여시대를 지난 후 한(漢)의 위만조선(衛滿朝鮮) 및 4군(郡). 2부(府)시대가 된 일도 있지만, 당시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일어난 고주몽(高朱蒙)이 한족의 군부(郡府)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고조선의 강토를 통합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창건하였다(B.C. 37).

한편 한강 남쪽은 옛날 진국(辰國)으로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등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즉 마한(馬韓)은 지금의 충청. 전라를 중심으로,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 강원의 일부를 중심으로, 그리고변한(弁韓)은경상. 경기. 강원의 일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 후 마한에는 백제(百濟)가 건국되었고(B.C. 18), 진한에는 신라(新羅)가(B.C. 57), 변한에는 가락국(駕洛國)이(B.C. 42) 각각 건국되었으므로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사실상 4국시대(四國時代)를 이루었던 것이다.

가락국은 그 당시만 해도 국가형성의 전단계(前段階)였으므로 변한의유민들은 산과 들, 바닷가에 모여들어 우물을 파서 마시고 농사와 고기잡이로 원시적(原始的)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王)과 신하(臣下)의 호칭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의 9간(九干: 아홉 추장)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만호에 7만 5천명이었다. 이는 신라(新羅) 건국 이전에 진한(辰韓)의 6부촌장(六部村長)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서기 42년) 3월 3일 구지봉(龜旨峰: 지금의 김해시 구산동 산81의 2)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고, 거기에는 오색찬란한 서광(瑞光)이 하늘 높이 이어지고 서기(瑞氣)가 천지에 가득해졌다. 9간이 마을 사람들 2, 3백 명이 데리고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들렸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니 자주색(紫朱色)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쌓여 있었다. 금합을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며 금합을 향해 함께 수없이 절했다.

그들은 정중하게 금합을 싸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가져가서 탁자위에 정중히 올려놓고 헤어졌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여섯 동자(童子)로 변하여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거룩하였으며, 탁자 위에 받들어 모시고 큰 절을 하며 극진히 공경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그 달 보름날에 왕위(王位)에 올라, 서기 42년 3월 15일이 가락국의 건국일이 되었다.

금란(金卵)에서 화생(化生)하였으므로 성(姓)을 김(金)이라 하고, 세상에 처음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나라 이름은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하였으며 나중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나머지 다섯 동자도 각각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여섯 가야국은 동쪽은 황산(黃山: 신라국경), 남쪽은 청해(靑海: 남해), 서쪽은 지리산(智異山: 백제국경),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으로써 경계(境界)를 삼았다. 임시궁궐을 세우게 하여 거처하였는데, 특히 질박하고 검소하여 집의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 계단은 겨우 석 자였다.

가락국(駕洛國) 시조대왕(始祖大王)의 난생설화(卵生說話)에 대해서는 고대사회의 개국시조의 화생설(化生說)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북부여(北扶餘)의 금와왕(金蛙王), 고구려의 고주몽(高朱蒙),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및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수로왕이 김해 구지봉에 내려왔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산악숭배(山岳崇拜)와 관련이 있다. 하늘의 신이 대개 땅 위의 가장 높은 곳, 곧 산꼭대기에 내려온다는 관념은 단군신화(檀君神話) 이래 우리나라 초기 개국신화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실제 하늘에는 나라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는다. 하늘에서 자주색 줄과 금합, 그리고 황금 알이 내려올 수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러한 신화의 내용은 토착사회에 북쪽으로부터 새로운 이주민(移住民)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김해(金海)에는 몇몇 토착집단(土着集團)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首露)집단이 결합하여 설립된 것이 가락국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6개의 황금색(黃金色)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太陽崇拜思想)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다. 수로왕이 태양신, 곧 천신(天神)의 후손(後孫)이라는 관념은 하늘의 자손, 곧 선택된 사람이라는 관념이 투영(透映)된 결과이다. 지배자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일반 백성들에게 내세워 현실세계(現實世界)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正當化). 합법화(合法化). 신성화(神性化)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에서부터 6가야국 즉, 금관가야(金官伽倻: 지금의 김해),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고령), 아라가야(阿羅伽倻: 지금의 함안), 소가야(小伽倻: 지금의 고성), 성산가야(星山伽倻: 지금의 성주),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창)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6가야연맹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이다.

한편 “그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라는 기록도 주목된다. 이 내용은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村落)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있어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 준다. 사람들은 항상 합리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므로 그들의 주된 생활공간인 촌락의 성립에서도 반드시 상당한 이유가 있거나 적당한 조건을 구비(具備)한 곳을 입지(立地)로 선택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은 고대사회에 촌락이 성립하는데 생활용수(生活用水: 우물)와 경작지(耕作地: 밭)의 확보가 중요함을 방증하는 것으로, 특히 우물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물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신화에도 등장하는데, 양산(경주 남산)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 그것이다. 초기 고대사회의 우물은 촌락 구성원들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기본적인 요소인 용수(用水)의 확보와 관련된 것으로 촌락공동체의 공동시설로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김해평야(金海平野)로 부르고 있는 지역은 옛날 가락국 시절에도 과연 육지(陸地)였으며, 사람들이 거주하였을까 하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실제로 김해시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가락국이 존재하였던 당시에는 바다에 수몰(水沒)되어 있었거나 갯벌로 이루어져 있었다. 20세기 초의 낙동강 제방(堤防)공사(대동수문~녹산수문까지 약 32㎞)와 더불어 비로소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으며,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本流)가 오늘날의 구포(龜浦)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는 서낙동강이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수몰(水沒)되지 않은 얕은 구릉(丘陵)들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에는 어김없이 패총(貝塚-조개무지)이 있었으며, 지금의 김해공항(金海空港)이 위치한 곳도 패총이 있던 자리였다. 

시조대왕(수로왕)은 서기 199년 3월 23일, 158세에 붕어(崩御)하여 납릉(納陵: 사적 73호)에 모셔졌다.

 

 

2. 허왕후(許王后)의 도래와 인도 아유타국(阿踰跎國)

 

김해 가락국의 개국신화에서 또 하나 주목(注目)되는 것은 [삼국유사]에 실린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과 관련된 기록이다. 황옥은 아유타국 공주(公主)로서, 천제(天帝)의 계시를 받은 부왕(父王)의 명으로 서기 48년에 해로(海路)로 들어와 수로왕과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때 황옥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는데, 이 석탑은 고려(高麗) 중반까지도 김해 호계사(虎溪寺)에 남아있었으며, 석질(石質)이 이곳의 것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 뒤 1873년(고종(高宗) 10년)에 김해부사(金海府使) 정현석이 허왕후릉(許王后陵) 곁에 옮겨 놓았으며 그 잔해(殘骸)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진해시(鎭海市) 용원에 가면 망산도(望山島)가 있고, 그 앞바다에 허왕후가 타고 왔다고 구전(口傳)되는 바위(돌배)가 있다. 실제로 허왕후가 이 바위를 타고 왔다고 볼 수는 없으나, 배의 용도에 따라 돌을 싣고 온 배라는 의미에서 유래(由來)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추정해 보면 불교(佛敎)와 접하지 못했던 옛 금관가야(金官伽倻), 즉 가락국인들의 눈에는 허왕후가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이 신기한 돌로 비쳐졌고, 이 때문에 돌배라는 명칭이 붙었을 것이다.

파사석탑은 돌의 비중(比重)과 석질, 색깔이 우리의 것과 다른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남해 연안 또는 인도(印度) 지방에서 산출되는 약돌인 파사석으로 조성(造成)된 탑(塔)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허왕후의 고향인 아유타국(國)은 어디인가.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유타국은 인도(印度)의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읍(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김해의 수로왕릉인 납릉(納陵) 정문(旌門)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 ‘활’, ‘연 꽃봉우리’, ‘남방식의 불탑(佛塔)’이 조합된 장식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고, 또 능의 중수기념비(重修記念碑)에는 ‘풍차모양의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문양들은 아요디아읍(邑)에서 지금도 대건축에 흔히 쓰이고 있는 장식(裝飾) 또는 조각이라고 한다.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완조(太陽王朝)의 고도(古都)로서,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에 그 나라의 왕자였던 ‘라마’는 태양신의 화신(化身)으로 숭배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김해까지 어떻게 바다를 건너왔는지 알 수가 없다. 현재까지 나타난 사실만으로 단정(斷定)하기는 곤란하며, 몇 가지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먼저 허왕후의 출발지가 인도의 아요디아가 아니라 태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인데, 그 근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요디아 왕가(王家)는 왕후가 출발하던 서기 48년보다 20, 30년 전인 서기 20년경에 쿠산왕조(王朝)의 군대에 의해서 왕도(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기록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국을 출발한 공주의 배가 풍랑 때문에 항해가 어려워 일단 귀향해서 배의 무게를 고쳐서 재출발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만약 아요디아에서 재출발하려면 갠지스강(江)을 거슬러 올라가야하는데 6월의 풍향(風向)이 갠지스강의 흐름과 동일하여 범선이 강물을 짧은 기간 내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주의 사실상 출발지는 오늘날 태국의 메남강가에 있는 고도(古都)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태국의 아유티야는 인도의 아요디아 왕국이 서기 1세기 이전에 건설한 식민국으로 밝혀져 있다.

다음으로 허왕후의 시호(諡號)인 ‘보주태후(普州太后)’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보주는 중국 사천성(泗川省)의 가릉강(嘉陵江) 유역이고, 허황옥은 그곳에 살던 소수민족(少數民族)인 파족(巴族) 출신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허황옥은 파족 중에서 중심세력의 가문인 허씨(許氏)계의 여인으로 서기 47년에 일어난 파족의 한(漢)나라 정부에 대한 반란(反亂)이 실패하자 강제로 추방(追放)된 사람들 중의 한 구성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결과 허황옥은 인도에서 직접 김해로 도래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녀의 선조(先祖)가 어떤 연유(緣由)로 오래전에 원래의 고향인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의 가릉강 유역의 보주지방으로 먼저 이주하였고, 허황옥은 이 보주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오늘날의 상해(上海)에 이르렀으며, 서기 48년경에 상해에서 해류(海流)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김해로 직접 건너오지 않고 태국의 아유티야에서 출발하였는가, 아니면 중국의 사천성 보주지방을 거쳐서 건너왔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도 아요디아풍(風)의 문화가 어떤 경로(徑路)인가로 들어와서 수로왕 신화(神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가야’ 또는 ‘가락’이라는 말은 고대(古代) 인도어인 드라비다어이고 그 뜻은 모두 ‘물고기(魚)‘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와 중세의 한국어에는 드라비다어의 어휘(語彙)가 무척 많이 발견되는데, 한국어의 벼(稻), 씨(種), 밭(田), 풀(草) 등이 드라비다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한편 허왕후의 도래와 관련하여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은 한국불교의 남방전래(南方傳來) 문제이다. 남방불교, 가야불교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곳곳에 있다. 김해의 신어산(神魚山) 은하사(銀河寺), 녹천의 명월사(明月寺), 장유의 불모산 장유암(長遊庵), 삼랑진의 만어사(萬魚寺)와 부은암(父恩庵), 그리고 허왕후가 7명의 아들을 성불시켜 칠불(七佛)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유적(遺蹟)들은 이야기로만 전해져 올 뿐 어느 것 하나 가야불교와 직접 연관 지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허왕후가 왔다든가 파사석탑이 들어온 사실, 그리고 [삼국유사] 중 <어산불영(魚山佛影)>조의 이야기(나찰녀와 독룡을 항복시키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수로왕과 연관시켜 수로왕대(代)에 불교가 가야에 전래(傳來)되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가락국에 불교가 수용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최초의 사찰(寺刹)은 서기452년에 허왕후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세운 왕후사(王后寺)이다. 

허왕후는 서기 189년 3월 1일, 157세에 붕어(崩御)하여 구지봉 남쪽 허왕후릉(사적 74호)에 모셔졌다.

 

 

3. 가락국의 역대(歷代) 임금

 

가락국의 시조대왕의 어휘(御諱: 휘(諱)는 이름의 극존칭)는 수로(首露)로,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서기 532년까지 10대에 걸쳐 역년(歷年) 491년의 왕업(王業)을 누렸으며, 고려(高麗)의 34대 475년, 조선(朝鮮)의 27대 519년에 비견(比肩)할만하다.

 

도왕(道王) 2세-재위(在位) 서기 199~253년, 54년간

 

어휘는 거등(居登)이며 시조대왕의 태자이다. 서기 199년 3월 23일에 즉위(卽位)하여 서기 253년 9월 17일에 붕어하였다. 능침(陵寢)은 왕도(王都) 서야(西野)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었으며, 다만 김해시 장유면(長遊面) 유하리(柳下里)에 능지(陵址)가 있다. 왕후는 경선왕후(敬善王后) 휘 모정(慕貞)이며, 성은 신씨(申氏)로 천부경(泉府卿)-재정관(財政官) 신보(申輔: 허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의 딸이다.

 

성왕(成王) 3세-재위 서기 253~291년, 38년간

 

어휘는 마품(麻品)이며 도왕의 태자이다. 서기 253년 9월 17일에 즉위하여 서기 291년 정월 29일에 붕어하였다. 왕후는 정혜왕후(貞惠王后) 휘 호구(好九)이며, 성은 조씨(趙氏)로 종정감(宗正監)-종묘(宗廟), 문교(文敎), 사관(史官) 조광(趙匡: 허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의 손녀이다.

 

 덕왕(德王) 4세-재위 서기 291~346년, 55년간

 

어휘는 거질미(居叱彌) 또는 금물(今勿)이며 성왕의 태자이다. 서기 291년 정월 29일에 즉위하여 서기 346년 7월 8일에 붕어하였다. 왕후는 덕희왕후(德禧王后) 휘 아지(阿志)이며, 아간(阿干) 아궁(阿躬)의 손녀이다.

 

 명왕(明王) 5세-재위 서기 346~407년, 61년간

 

어휘는 이시품(伊尸品)이며 덕왕의 태자이다. 서기 346년 7월 8일에 즉위하여 서기 407년 4월 10일에 붕어하였다. 능침(陵寢)이 지금의 김해시 장유면 능동(陵洞)에 있어 무관석(武官石) 2구(具)가 전해진다. 왕후는 의덕왕후(議德王后) 휘 정신(貞信)이며, 사농경(司農卿)-농림관(農林官) 극충(克忠)의 딸이다.

 

신왕(神王) 6세-재위 서기 407~421년, 14년간

 

어휘는 좌지(坐知) 또는 금질(金叱)이며 명왕의 태자이다. 서기 407년 4월 10일에 즉위하여 서기 421년 5월 12일에 붕어하였다. 능침은 지금의 거창군 마리면(馬利面) 영승리(迎勝里) 사능산(絲陵山)에 있었다고 전한다. 1936년 대홍수 때 능비(陵碑)가 출토되었다가 제방 아래로 매몰되었다고 전한다. 왕후는 자혜왕후(慈惠王后) 휘 복수(福壽)이며,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딸이다.

 

혜왕(惠王) 7세-재위 서기 421~451년, 30년간

 

어휘는 취희(吹希) 또는 질가(叱嘉)이며 신왕의 태자이다. 서기 421년 5월 12일에 즉위하여 서기 451년 2월 3일에 붕어하였다. 왕후는 소자왕후(昭慈王后) 휘 인덕(仁德)이며, 각간(角干) 진사(進思)의 딸이다.

 

장왕(莊王) 8세-재위 서기 451~492년, 41년간

 

어휘는 질지(銍知)이며 금질왕(金銍王)이라 부르고 혜왕의 태자이다. 서기 451년 2월 3일에 즉위하여 서기 492년 10월 4일에 붕어하였다. 시조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서기 452년에 김해시 장유면 장유산(長遊山)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 절 근방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바쳐서 공양비(供養費)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신라에서 불교를 국교화(國敎化)한 법흥왕 15년(서기 528년)보다 77년 전이다. 왕후는 안정왕후(安定王后) 휘 방원(邦媛)이며, 사간(沙干) 금상(金相)의 딸이다.

 

숙왕(肅王) 9세-재위 서기 492~521년, 30년간

 

어휘는 겸지(鉗知)이며 금겸왕(金鉗王)이라 부르고 장왕의 태자이다. 서기 492년 10월 4일에 즉위하여 서기 521년 4월 7일에 붕어하였다. 능침은 거칠국(居漆國: 동래) 내산(內山)에 모셔졌다는 설이 있고, 동래읍지(東萊邑誌)에는 군북(郡北) 2십리 구서리(久瑞里)에 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서리는 지금의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이다. 왕후는 효인왕후(孝仁王后) 휘 숙(淑)이며,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이다.

  

양왕(讓王) 10세-재위 서기 521~532년, 12년간

 

어휘는 구형(仇衡) 또는 구해차휴(仇亥次休)이며 숙왕의 태자이다. 서기 521년 4월 7일에 즉위하여 서기 532년에 신라에 나라를 선양(禪讓)하고 방장산(方丈山) 태왕궁(太王宮: 산청왕대유지(山淸王臺遺址))에 들어간 후 5년째 되는 서기 536년에 붕어하였다. 능침(陵寢)은 지품천현(知品川縣) 왕산하(王山下)에 모셔졌는데, 지금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今西面) 화계리(花溪里)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서기 676년)에 중사(中使)를 보내어 석공(石工)으로 하여금 높이 3장(丈)에 4면(面) 7급(級)의 석릉(石陵)을 축조(築造)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구조로 보아 장례(葬禮)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후는 인선왕후(仁宣王后) 휘 계화(桂花)이며, 분수이질(弅水尒叱)의 딸이다.

 

 

4. 가락국의 흥망(興亡)

 

(1) 가락국의 영역과 애민(愛民)정치

 

구지봉에 탄강한 김수로왕은 키가 9척이며 눈썹은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고 눈동자는 겹으로 되었다고 한다. 서기 42년 3월 15일 9간(干)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국호를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수도를 김해(金海)로 정했다. 수도 김해는 낙동강 하류 삼각주(三角洲) 지역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이집트 나일강 하류와 흡사하다. 낙동강은 태백산(太白山) 황지에서 시작하여 안동, 상주, 의성, 선산, 고령, 합천, 함안, 밀양의 모든 강물을 합하여 김해 동쪽에 이르러 삼각주(三角洲)를 형성하고 대한해협(大韓海峽)으로 들어가는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다.

당시 가락국은 1만호에 인구 7만 5천여 명으로 국토의 경계는 동으로 황산강(낙동강)이요, 서남은 창해(남해),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등이 모두 이주민(移住民)들의 정복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 것과는 달리 가락국과 신라는 이미 먼저 거주하고 있던 토착세력(土着勢力) 즉 가락국은 9간(干), 신라는 6촌장(村長)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는 방식으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김수로왕은 왕위(王位)에 오른 후 고대사회에서는 드물게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치(愛民政治)를 표방하여 창업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흙담과 이엉을 사용하여 임시로 대궐을 짓고 질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정사(政事)를 펼쳤다고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기록하고 있다. 신하들이 이제는 대왕께서도 큰 대궐을 지어 왕으로서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간하자 대왕은 “백성들의 생활이 아직도 넉넉하지 못한데 내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대궐부터 지어서야 되겠느냐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진 다음에 대궐을 지어도 늦지 않다”면서 3년 동안이나 토담과 이엉으로 된 가궁(暇宮)에서 정사(政事)를 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왕은 관청(官廳)의 청사나 무기고, 창고 등을 지을 때나 성곽(城郭)을 쌓을 때에도 반드시 농번기를 피하여 농한기를 이용하였으며, 농한기에 시작하였던 공사라 할지라도 농번기가 되면 중단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대왕의 애민사상(愛民思想)은 민본적(民本的) 왕도정치를 실현한 최초의 군주(君主)로 보아야 한다.

 

(2) 고대국가(古代國家)로의 성장

 

가락국은 수로왕의 치세(治世)기간인 2세기 초엽에 이미 왕권(王權)이 확립되고 1만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에 있어서 1세기 전후에 형성되어 신라가 한반도(韓半島)를 통일하기 전까지 존재하였던 많은 국가 가운데 김부식(金富軾)과 중(僧) 일연(一然)이 무슨 근거에서인지 6세기까지 존재했던 가야는 쏙 빼버리고 고구려, 백제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를 지칭하여 삼국시대라고 기술했다. 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어 현재까지도 학계(學界)에서는 고대국가에 대한 개념도 정립하지 않으면서 신라, 고구려, 백제만을 고대국가에 포함시켜 이 시대를 삼국시대라 하며, 6세기까지 존재했던 가야는 부족국가로 치부하여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가야를 「성읍국가(城邑國家)」라 하여 부족국가보다는 한 단계 높은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국가란 부족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와 왕위세습(王位世習)이 부자상속(父子相續)으로 이루어지는 국가를 말한다. 여기서 부족적인 전통이란 왕이 부족장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형태를 지칭한다. 이때는 중앙집권(中央集權)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형제상속이거나 유능한 부족장이 왕으로 추대되어 부자상속의 체제가 확립되지 못한 시기이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모두 초기에는 형제상속제로서 왕권(王權)이 강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나라에 따라 일정하지 않지만 3국 중 가장 늦은 신라를 대개 3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가락국 역시 수로왕(首露王) 이후 거등왕(居登王)으로 이어지는 부자상속의 중앙집권체제는 2세기 말엽에서 3세기 초엽이다. 당시 신라와 가락국의 전투규모가 1만 명 이상의 군사(軍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데서도 단순히 부족국가의 전쟁규모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사학계(史學界)에서는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던 가락국을 고대국가로 보지 않고 부족연맹체 또는 성읍국가로 보고 있는데 대해 심한 의아심을 나타내고 있다. 국가란 언제나 체제의 확립으로 분류되는 것이며, 국토의 면적으로 분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문화적(文化的)으로도 신라나 백제에 못지않은 유물(遺物)들로 보아 부족국가로의 분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새로운 시각이다.

 

3. 신라(新羅)와의 대립

 

유명한 실학(實學)의 대가(大家)인 정약용(丁若鏞)의 [별진별고]를 보면 수로왕은 즉위한 지 3년인 서기 44년 3월, 금관(金官: 김해)에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래 금관이 국도(國都)의 이름으로서 나라를 지칭한 국명인 금관가야(金官伽倻)로 사용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수로왕이 즉위한 지 37년만인 서기 78년, 신라 탈해왕(脫解王)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가락국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충돌했다. 황산진구는 김해와 양산 사이로 낙동강 유역에서 철(鐵)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이 전쟁은 동북방으로 진출하려는 김해 가락국의 세력과 남방(南方)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세력이 충돌한 것으로 가락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영토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서기 88년 수로왕 47년에 신라 파사왕(破娑王)은 거창에 가소성(可召城)을 쌓고 그 후 다시 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라가 가락국에 대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성을 쌓는 것은 외부 침입에 대한 방어나 혹은 공격을 위한 거점(據點)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행위로 보아야 한다. 이 가소성과 마두성이 쌓아지게 되자 가락국은 연이어 신라를 공격한다.

이와 같이 가락국과 신라와의 큰 전쟁기록은 주로 2세기 초에 많이 나타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신라 5대 파사왕 22년(서기 102년) 실직곡국(悉直谷國: 삼척)과 음즙벌국(音汁伐國: 안강)이 영토를 다투어 신라에 와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파사왕은 말하기를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혜가 있으니 그를 맞이하여 판결을 구하자’라고 제안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수로왕의 위세(威勢)와 가락국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신라는 가락국 주변의 소국(小國)들을 차례로 병합(倂合)하고 6대 지마왕(祗摩王) 4년(서기 115년)에 왕이 직접 김해 가락국을 3차례나 공격하였으나 모두 패했다고 한다. 이때 신라군의 규모는 약 1만 명이었다고 하며 전투지역은 대개 양산(陽山)과 동래(東萊)로 추정되고 있다. 가락국에 위협을 느낀 지마왕은 이후 서기 121년에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대증산성은 지금의 동래이다.

 

4. 가락왕손(駕洛王孫)의 갈래

 

허왕후(許王后)를 맞이한 수로왕은 나라의 옛 제도를 새롭게 고치고 나라 안을 잘 다스려 백성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여 그 교화(敎化)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따르고 그 다스림은 너그러우면서도 잘 이루어졌다.

왕과 왕후의 금슬(琴瑟)은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그리고 밝음이 어두움을 짝짓듯 했다고 전한다. 허왕후는 태자 거등(居登)을 비롯하여 아들 10형제, 딸 자매를 낳고 서기 189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땅이 꺼진 듯 크나큰 슬픔 속에 구지봉 동쪽 언덕(지금의 김해시 구산동) 허왕후릉에 장사 지냈다. 

수로왕은 생전(生前)에 왕후가 늘 그의 성(姓)을 이 땅에 전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자 이를 가엽게 여겨 10왕자 중 2자(子: 둘째 아들)로 하여금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여 후세까지 모성(母姓)을 전하게 하여 허왕후의 아름다운 내조에 보답했다. 허씨로 사성받은 왕자의 후손들이 후에 여러 개의 본(本)으로 분류된다.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신라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가락의 왕손이나 유민들은 여러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 허씨 후손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세거(世居)한 다섯 곳의 지명을 따라 허씨는 5개의 본으로 나누어진다. 김해에 계속 머문 후손들은 김해허씨(金海許氏), 하양으로 이주한 후손들은 하양허씨, 그 외에 양천, 태인, 함창 등으로 분류되지만 모두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이다.

한편 신라 36대 경덕왕 때 허씨의 후손 중에 아찬(阿湌)의 벼슬에 있던 허기(許奇)가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당나라 황제는 현종이었다. 현종은 초기에는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나 양귀비(楊貴妃)를 후궁으로 들인 후부터 정사를 어지럽혀 마침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 이 반란군이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까지 쳐들어 왔다. 이 난리통에도 허기는 현종을 호종(護從)하여 멀리 촉(蜀)나라까지 따라갔다. 난이 끝난 후 현종은 허기에게 황성(皇姓)인 이(李)씨를 사성(賜姓)하고 소성백(邵城伯)이락 작위와 식읍(食邑) 1천 5백호를 내렸다. 그래서 허기는 자기의 본래 성인 허씨 앞에 황성인 이씨를 붙여 이허(李許) 복성(複姓)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조정에서는 허기가 당나라에 오래 머물러 4년 만에 돌아왔으므로 이를 허물하여 당나라 황제가 내린 작위(爵位)와 식읍을 주지 않았다. 그 후 허기의 10세손인 허겸(許謙)에 이르기까지 이허(李許) 복성을 사용하였으나, 허겸의 아들 한(翰)에 이르러 허성은 쓰지 않고 이씨 단성(單性)만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경원을 중심으로 세거(世居)하게 되어 경원이씨라 불리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가락왕손은 또 하나의 갈래를 이루었으니 고려조(高麗朝)에 크게 현달한 이자겸(李資謙), 이자연(李子淵) 등이 곧 이들이고, 이들은 후에 경원이 인천으로 지명이 바뀌게 됨에 따라 인천이씨(仁川李氏)가 된 것이다.

 

5. 가락국의 멸망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으로 추정되는 탁기탄(啄己呑)이 신라에 병합되고 또 백제군이 아라가야(함안)을 진격하여 그 일부를 점령하게 되니, 이제 가야 남부지역에는 김해의 가락국과 탁순국(卓淳國: 창원으로 추정)만 남게 되었다. 사실 이 지역은 대왜(對倭) 교역상 요충지(要衝地)이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세력균형 위에서만 자기의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백제의 아라가야 진주(進駐)는 결국 신라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가락국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신라는 중요한 해운기지(海運基地)인 김해지역까지 백제의 영향권에 휩쓸릴 것을 경계하여 상신(上臣) 이사부(異斯夫)를 파견하였고, 이사부는 다대포(多大浦) 부근에 3천여 병사를 이끌고 군사적 시위를 하면서 3개월 동안이나 머물렀던 것이다. 이는 신라의 가락국 침공에 대한 가야제국이나 백제, 왜(倭)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나 왜의 이의제기(異意提起)나 적극적인 간섭이 행해지지 않음을 확인한 신라의 이사부(異斯夫)는 다대포로부터 낙동강을 건너 김해 가락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신라가 대군(大軍)을 일으켜 가락국을 공격함에는 양산에서 낙동강 황산진(黃山津)을 건너 김해 동북부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인데 일부러 다대포까지 내려와 주둔(駐屯)한 것은 해로(海路)로 왜(倭)의 원군(援軍)을 경계한 것이다. 낙동강을 건너온 신라군은 다대포, 김해, 웅천 등 4촌(村)을 차례로 점령했으며, 신라에 투항(投降)한 사람들은 모두 신라 영토로 옮기고 말았다.

당시 가락국은 500여 년에 걸쳐 태평성대를 누렸고, 국고와 민심이 전쟁에 대비할 만한 국력도 있었으므로 백관(百官)들은 신라와 일전을 겨루어야 한다는 항전론(抗戰論)이 강하여 양왕(讓王)은 친히 장졸(將卒)을 이끌고 낙동강 연안에 출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피아간(彼我間)에 사상자가 속출하니 인자한 양왕은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전화(戰禍)에서 백성들을 구출하는 것도 군왕의 양민지도(養民之道)라 생각하여 서슴없이 전쟁을 중단하고 신라에 선양(禪讓)하기로 결심하였다.

밀양 이궁대(離宮坮)에서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에게 양국의 절차를 끝내고 왕후, 왕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지품천현(知品川縣) 수정궁(水晶宮)을 향해 떠날 때 법흥왕도 양왕의 애민지정(愛民之情)과 양민지도(養民之道)가 높음에 크게 감격하여 신라의 국빈(國賓)으로 예우하여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모두 신라에 출사(出仕)하여 세세로 높은 공훈(功勳)을 받아 신라 제일의 귀족이 되고 화랑도(花郞徒)의 수반(首班)이 되고 신라의 기둥이 되었다.

양왕이 즉위한 지 12년만인 서기 532년,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니 태조(太祖) 김수로왕이 건국한지 10세(世) 491년 만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끊기고 말았다.

가락국은 나라가 신라에 병합(倂合)되기 한 해 전인 양왕 11년(신라 법흥왕 18년) 서기 531년 겨울 연자루(燕子樓)를 헐었다고 한다. 밤마다 연자루가 울며 가락국의 수도 금관성(金官城)을 진동시키자 왕이 누(樓)를 헐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태조의 옥첩(玉牒: 왕실의 계보)에 이르기를 연자는 임자(壬子)이니 나라를 신라왕에게 전하여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이 양왕이 산청 방장궁(方丈宮)에 이어(移御: 임금의 거처를 옮김)하고 왕위를 물려준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김부식(金富軾)은 가락국의 멸망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법흥왕 19년(서기 532년)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비(妃)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무력(武力), 셋째 무덕(武德)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이들을 예로 대하여 상등(上等)의 위(位)를 주고 본국으로 식읍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까지 이르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구형왕은 김씨이고 정광(正光)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서기 562년 9월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대를 일으켜 침입해 왔는데 왕이 친히 군졸을 부렸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전(對戰)할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나라에 머무르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솔지공(率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계화(桂花)이며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력각간(武力角干)이고 셋째는 무득각간(武得角干)이다」라고 되어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형왕이 임자(壬子)년 서기 532년에 신라에 병합했으니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서기 42년부터 491년간이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신라에 병합된 것이 보정 2년으로 서기 562년이니 가락국의 역년이 521년이 된다. 어쨌든 [삼국사기]의 기록과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왕호(王號)나 연대가 서로 다르나, 대개 [삼국사기]의 것을 따라 그 역년을 491년으로 보고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옛날 족보와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족보를 보면 모두 무력왕(武力王)이라는 글귀가 있고, 또 무력왕 재위 7년이라 하였다, 또 삼한역대도(三韓歷代圖)에는 가락국은 10대 12왕이며 국가를 누린 햇수는 521년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밝혀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대사략(歷代史略)에는 「가락국왕 김구형이 신라에 항복하니 신라왕이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본국(가락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10대이며 491년간 통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락국이 망한 지 6,7백 년이 지난 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집필(執筆)됐으니 기록이 분명할 수 없겠지만 사가(史家)가 필(筆)을 놀림에 한 번의 잘못이 만 번의 잘못이 되고 후세의 삼사(三史: 국사, 야사, 가사(家史))를 다 잘못되게 한 것이니 참으로 사필(史筆)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다.

 

 

 

 

발췌, 편집 :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김해김씨(金海金氏) 서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계보해설(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