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II. 김유신가(金庾信家)
1. 김유신가의 형성(形成)
(1) 김유신 가문(家門)의 등장
서기 562년 고령 대가야(大伽倻)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신라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멸망한 가야인의 상당수는 신라 각지에서 노비(奴婢)로 전락하여 생활하였으나, 간혹 신라에서 출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진흥왕대(眞興王代)에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한 우륵(于勒)이라든지, 문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강수의 조상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가야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경주에 거주하지 못하고 지방도시 국원(國原: 충주)에서 일생을 마쳐야만 했다. 가야를 흡수한 뒤에 신라는 정책적으로 가야인들을 강제로 그곳에 옮겨 살게 하였던 것이다.
가야 출신으로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유신(金庾信)이었다. 김유신은 그 인물됨과 자질면에서 워낙 걸출하였던 탓에 후일 문무왕(文武王)과 더불어 신라의 2성(聖)으로 추앙받기도 하였으나, 이미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가야출신(出身)이라는 제약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은 주로 군공(軍功)을 통해 세력형성을 꾀하였으나 왕녀(王女)와 야합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김유신과 그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구형왕조(仇衡王朝) 및 문무왕(文武王)의 제지(制旨)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료(史料)에 의하면 김유신은 법흥왕(法興王) 때인 서기 532년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眞骨)귀족이 된 김해 가락국왕조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으로 유신의 증조부(曾祖父)가 되는 김구형(金仇衡)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상등(上等)의 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아 그들의 본래 근거지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구형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무력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그는 김유신의 조부(祖父)로서 가락국 왕족(王族)의 가문(家門)을 대표하여 활동한 장본인이다. 이처럼 김무력(金武力)으로부터 비롯되는 가야왕족의 활동은 그들이 신라왕실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얻게 되는 반대급부, 즉 신라 중앙정계(政界)로의 진출이라는 계기가 되었다.
(2) 김유신가의 번성(繁盛)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그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진흥왕(眞興王) 12년 이전에 이미 병부령(兵符領) 이사부(異斯夫)를 도와 북방경략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적성비에 진흥왕을 수가(隨駕)한 10명의 고관(高官) 중에 무력은 비차부(比次夫) 다음의 8번째로 기록되고 있어 아직까지는 신라사회에서 그 정치적 비중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14년(서기 553년)에 무력은 아찬으로서 신주군주(新州軍主)에 임명되고, 다음 해의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백제의 성왕(成王)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신라가 한강유역(漢江流域)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무력의 공훈은 결국 그들 가문을 신흥귀족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녕비(昌寧碑: 서기 561년에 세운 진흥왕순수비(巡狩碑) 중의 하나)에는 42명의 수가신(隨駕臣) 중에서 무력이 잡찬으로서 8위에 기록되고 있고, 마운령비(摩雲領碑: 서기 568년에 세운 진흥왕순수비(巡狩碑) 중의 하나)에는 상대등(上大等) 거칠부(居柒夫) 다음의 고관으로 승진되고 있어 진흥왕 30년(서기 569년)경에 이르러 무력은 최고위층의 관료로 부상하였다.
이렇듯이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그 자신은 입신(立身)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골품제(骨品制)사회 아래에서의 신분적인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특히 혼인(婚姻)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김유신 가문의 혼인에 얽힌 두 개의 설화(說話)는 이러한 신분의 벽을 실감나게 해준다. 즉 당시 김유신의 집안사람들은 가야의 왕족으로서 진골(眞骨)에 해당하는 신분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이 진흥왕 말년에 최고위층의 관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왕족이었던 숙흘종(肅訖宗)의 딸과 결혼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숙흘종이 자신의 딸 만명(萬明)과 김무력의 아들 서현이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딸을 별궁(別宮)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명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뛰쳐나와 김서현을 따라 나섬으로써 이 혼인은 겨우 성사될 수 있었다.
물론 숙흘종이 지증왕(智證王)의 손자이자 진흥왕의 친제(親弟)로서 왕실의 지친(至親)이었다고는 하나, 서현의 가문 또한 골품상으로도 왕골(王骨)에 준하였다. 그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숙흘종이 그의 딸과 서현과의 결혼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즉 서현이 비록 진골(眞骨)이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관습상으로 신라왕실에 버금할 수 없었던 신분이었다는 점. 더욱이 숙흘종으로서는 보수적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구성원과 그들을 대표하는 상대등(上大等)과 같은 세력의 반대를 경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명이 서현을 따라감에 이르러서 숙흘종은 이들의 혼인을 묵인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는 김유신 가문이 비록 그 신분상의 한계가 있다고 하나 신라 중앙 정치무대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한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에서 김유신이 왕경 사람이라 한 것은 그의 가문이 할아버지 김무력 이후로 중앙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만명과 결혼한 시기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서기 590년) 한 두해 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때 당시에 유신의 할아버지 무력이 이미 신라 최고의 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뒷날 유신의 누이 문희가 김춘추와 혼인할 때도 역시 비정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 유신은 ‘중매 없이 야합함(無媒而合)’을 책하며 문희를 불에 태워 죽이려 하여 왕명(王命)으로 춘추와 문희의 결혼을 공인받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그의 누이 문희의 혼인을 주시할 때 가야계의 김유신 가문은 비록 진골(眞骨)이라 할지라도 신라의 왕골과는 일정하게 차이가 있는 신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부단한 무공(武功)을 통한 관직에서의 승진과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그들의 신분적 상승을 공인받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계(伽倻系) 김유신 가문의 노력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그들 가문의 유지와 성장을 모색하고 있었던 진흥왕계(眞興王系)의 김용춘(金龍春: 김춘추의 아버지)의 의도와 서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즉 서현의 입장에서는 비록 숙흘종의 딸 만명과 혼인하여 왕실의 지친과 관계를 맺었다고는 하나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기에는 골품제(骨品制)라는 벽이 너무 높았으며. 그들의 신분적 차별을 깨뜨릴 만한 강력한 조력자(助力者)를 왕실 내에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반면에 김용춘으로서는 진지왕(眞智王)의 폐출 이후 왕위계승에서 소외되고 있는 가문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귀족가문(貴族家門)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양(兩) 가문(家門)의 욕구가 일치된 상황에서 진평왕 51년(서기 629년)에 김용춘과 김서현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켜 양파(兩派)의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적극적인 친교와 협조는 양 가문의 결합에 실마리를 마련케 하였으니, 김용춘과 김서현의 결속은 신라사회에서 신귀족(新貴族)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연의 전단계로서 신라사회의 정치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해 준다고 하겠다. 더구나 선덕여왕(善德女王)대에 이르러 계속된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은 신귀족집단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러한 국가적 위기의식은 이들의 정치적 진출을 허용하였다. 때문에 선덕여왕(善德女王) 11년(서기 642년)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大耶城) 함락 때 성주(城主)였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品釋) 일가(一家)의 몰살이라는 김춘추 가문의 개인적인 비극을 국가의 불행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으며, 용춘과 서현 가문은 더욱 결속하게 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미 두 집안간의 혼인(婚姻)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이어 선덕여왕 16년(서기 647년)에는 비담(毗曇), 염종(廉宗)의 모반(謀反)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김춘추, 김유신 등의 신귀족세력과 비담을 중심으로 하는 구세력간의 쟁패전으로 신귀족세력이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반란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상당수의 유력한 구귀족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하는 무열계(武烈系)는 대권을 위해 유신계(庾信系)와 결속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알천과 같은 일부 구귀족을 흡수하여 과도체제로서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추대하였다. 따라서 진덕여왕의 8년간에 걸친 재위기간은 무열왕권의 성립시기인 동시에 그들의 정책시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김춘추, 김유신 두 사람은 신라 정계(政界)를 주도하는 주역으로서 춘추는 정치와 외교에서, 유신은 군사에서 당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정도의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太宗武烈王本紀)에 전하고 있는 김춘추의 왕위 등극 기사에 의하면, 진덕여왕이 죽자 군신(君臣)들은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은 사양하면서 춘추를 추대하니 춘추는 두세 번 사양 끝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김유신의 위세로 인해 당시 상대등(上大等)의 지위에 있던 알천(閼川)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김유신열전에는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으므로 유신이 재상(宰相)인 알천과 모의하여 춘추를 즉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남산 오지암에서 열린 화백회의 도중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공(公)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당시 김유신의 힘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김춘추는 화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였다. 지금까지 방계(傍系)였던 무열계는 왕위를 계승하는 가문으로 등장하였으며, 유신계도 이에 버금가는 가격(家格)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무열왕(武烈王) 2년에 왕녀 지소가 김유신에게 출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열왕 7년 상대등 김강의 사망으로 유신이 상대등으로 되었음은 당시에 김유신 가문의 위치를 웅변해 준다고 하겠다.
김유신은 상대등이 된 직후 신라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백제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어 문무왕(文武王) 원년(서기 661년)에도 제 1차 고구려(高句麗) 정벌군의 대장군이 된 후 문무왕 2년에는 당군(唐軍)의 군량미 수송을 지휘한 바 있다. 문무왕 8년에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김인문(金仁問)이 대신하였고,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마침내 타계하였다.
(3) 김유신가(家)의 쇠퇴
김유신 가문은 그 성립과정에서 주로 군사적(軍事的) 활동을 통해 기반을 닦았으며, 무력(武力). 서현(舒玄). 유신(庾信)의 3대에 걸친 군주(軍主)직 계승은 군주가 단순한 외직이 아니라 병부령, 상대등의 전단계로서 당대 제일급 인물이 받은 관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특히 무력은 신주군주(新州軍主)로서 한강유역의 경영에 큰 몫을 하였으며, 서현은 민노군(진천)의 태수로 백제방어에 공을 세운 후 대량주(大良州: 합천)군주가 되어 신라 서남방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도 합천은 대야성(大野城) 비극을 맞은 바로 그 곳이어서 훗날 유신이 압량주 군주를 지낼 때 여기에서 백제군을 전멸시켜 한을 풀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주(新州), 대량주(大良州), 압량주(押梁州)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이 지역의 책임관을 역임한 유신가에는 신라사회에서 큰 비중(比重)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유신가에는 유신이 죽고 난 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김유신에 대한 평가 및 그의 후손(後孫)에 대한 처우가 역대로 어떻게 변화하여 갔는가를 살펴보자.
문무왕은 김유신의 임종을 앞둔 병석에 임하여 “과인에게 경(卿)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은데,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인민은 어찌하며 사직은 어찌하겠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러한 극진한 존경은 그의 삼국통일(三國統一)에서의 공로와 문무왕과의 인척관계(姻戚關係: 김유신의 누이 문희가 문무왕의 어머니이다)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통일의 기분이 가시지 않은 신문왕대(神文王代)만 하더라도 김유신은 지극히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가령 신문왕대에 동해에 소산(小山)이 나타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든 대(竹)를 제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일관(日官)은 “성고(聖考: 문무왕)가 지금 해룡(海龍)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또 김유신공이 삼십삼천(三十三千)의 일자(一子)로서 세상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는데, 이성(二聖: 문무왕과 김유신)이 덕을 같이하여 성(城)을 지키는 보물을 내어주려 하니 만일 폐하가 해변에 가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대보(大寶)를 얻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신문왕이 그 산에 가자 용(龍)이 나와서 맞이하였다는데, 왕이 “이 산과 대(竹)가 혹은 갈라졌다 혹은 합쳤다 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라고 묻는 데 대해서 용은 “지금 왕고(王考)가 해중(海中)의 대룡(大龍)이 되고 유신이 천룡(天龍)이 되어 이성(二聖)이 마음을 같이 하여 값을 칠 수 없는 대보를 내어 나로 하여금 비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김유신은 문무왕과 함께 이성(二聖)이라 불리우고 있다. 또 김유신은 본래 삼십삼천의 일자였으니, 죽어서 천신이 되었느니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김유신이 그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얼마나 존대(尊待)를 받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기분이 가시면서부터 김유신의 지위(地位)는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유신의 후손들은 출세의 길이 좁아졌다. 성덕왕대(聖德王代)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김유신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이 성덕대왕을 섬기어 대아찬이 되어 여러 번 은고(恩顧)를 받았는데 왕의 친속(親屬)들이 대단히 질투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이라 왕이 월성(月城)의 둔덕 위에 올라 조망하며 시종관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고 놀더니, 명하여 윤중(允中)을 부르게 하였다. 간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지금 종실척리(宗室戚里)에 어찌 호인(好人)이 없겠습니까. 유독 소원한 신하를 부르니 어찌 이른바 친(親)을 친(親)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平安無事)한 것은 윤중의 조(祖)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과 같이 이를 잊어버린다면 선(善)을 선(善)으로 대함에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義)가 아니냐’고 하였다. 드디어 윤중을 옆에 앉게 하여 그 할아버지(김유신)의 평생에 대한 말을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가게 하고 절영산(絶影産) 말 한 필을 주었다. 군신이 불만(不滿)할 뿐이었다.
위의 기록에서는 신라왕실 일족(一族)이 김유신의 후손, 나아가서는 다른 귀족 일반을 배척하는 기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대(中代) 무열왕계의 전제주의적 경향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대의 전제주의적 경향 속에서는 아무리 김유신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왕실(王室)에게 배척을 받고 점차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고 하겠다.
김유신 가문은 혜공왕대(惠恭王代)를 전후하여 드디어 6두품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유신계의 최후를 장식한 김암(金巖)이 이찬으로서 태수(太守), 시랑(侍郞), 두상(頭上) 등 6두품 계열이 주로 맡는 관직에 임명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김암과 같은 세대인 장청(長淸) 역시 집사랑(執事郞)에 있었다. 랑(郞=史)은 중앙관부의 최말단(最末端) 관리로서 6두품 이하의 계층에서 주로 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신계가 8세기 중반 이후에는 그 신분(身分)이 6두품 이하로 강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즉위를 전후하여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계(伽倻系) 세력은 절정기를 이루었으나 김유신이 죽은 뒤 그 후손들은 신라 왕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점차 약화되어 갔고, 통일신라(統一新羅) 말에는 사회적으로 거의 몰락(沒落)하기에 이르렀다.
2. 김유신가의 인맥(人脈)
(1)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 김무력(金武力)
김무력은 서기 518년,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양왕(讓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532년 9월,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가락국을 공격해 오자 양왕은 나라를 신라에 양여(讓與)하고 산천 수정궁(水晶宮)에 은거(隱居)했다. 그러나 아들 세종(世宗), 무력(武力), 무득(武得) 3형제는 경주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무력은 진흥왕(眞興王) 때 명장 이사부(異斯夫)를 도와 북방경략에 참여하였다.
당시 백제에서는 성왕이 즉위하여 서기 538년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泗沘: 지금의 충남 부여)로 옮기고, 신라와 화친(和親)하여 백제 중흥(中興)을 꾀하고 있었다. 성왕은 서기 551년 한강유역을 되찾으려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옥천지방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6개 군(郡)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곤경에 처한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가 탈환한 6개 군을 모두 빼앗아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으며, 무력은 이때 싸운 공로로 신주도독(都督)이 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기 554년 대가야(大伽倻)와 연합하여 신라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당시 관산성에서는 신라의 군주(軍主) 우덕(于德)이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백제군의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마침 신주에 있던 무력은 자신이 거느린 병력을 이끌고 급거 출전하여 그해 7월 성왕을 노고산성(老姑山城: 지금의 대전 동구 직동 피골)에서 전사시켰으며, 4명의 좌평(佐平)을 참살하고 병사 2만 9천여 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大勝)을 거두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무력의 한강유역 쟁취와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무력 역시 신흥 무장(武將)으로서의 발판을 확보하게 되어 신라사회의 최고위 인물로 부상되었다. 무력이 임명되었던 군주직(軍主職)은 당시 신라 제1급 인물이 받던 최고위 지방관직이었는데, 무력과 아들 서현, 손자 유신 등 3대가 군주직(軍主職)을 역임하였다.
무력은 47세인 서기 564년 장자 서현을 낳고, 서기 579년 10월 16일 향년 62세로 별세하였다. 벼슬은 각간(角干)에 이르렀고 부인 박씨(朴氏)는 법흥왕비(法興王妃) 보도부인(保刀夫人)의 동생이었다.
(2) 김유신을 길러낸 김서현(金舒玄)과 만명(萬明)
김서현은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때의 장군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世孫)이고, 명장 김무력의 아들이며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이다. 김서현은 진평왕 25년인 서기 564년에 출생하여 진흥왕(眞興王)의 질녀(姪女)인 만명과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혼하였다. 서현은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의 태수로 임명되어 만명과 함께 살았다. 당시 서현 부부가 살았던 집터가 지금의 충북 진천시 상계리 계량마을에 있는 〈담안밭〉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이 계량마을 부근에 길상산(吉祥山)이 있는데 서현 부부는 32세(서기 595년) 때 낳은 유신의 태(胎)를 이곳에 묻어 이산을 〈태령산〉이라고도 한다. 만명부인은 자녀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장남 유신(庾信)과 차남 흠순(欽純)에게 망령되이 교우(交友)하거나 놀지 말라고 훈도하였다. 경주로 이사한 후 어느 날부터인가 유신이 천관(天官)이라 불리던 여인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만명은 유신을 불러 앉히고 “나는 이미 늙었다. 밤낮 네가 장성하여 큰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왔다. 그런데 너는 술을 마시고 여자나 희롱하고 다니느냐.”라고 울면서 타일렀다. 이에 유신은 “다시는 그 여자 집에 출입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어머니에게 맹세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유신이 밖에 나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데 말이 눈에 익은 옛 길을 접어들어 그녀의 집으로 들어섰다. 천관을 발길을 끊었던 유신이 말을 타고 대문 앞에 다다르자 기쁘고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유신을 맞이하려 했다. 이때 유신은 돌연 깨달은 바가 있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다. 그 일이 있은 후 천관은 원사 한 곡을 지어 속세(俗世)를 떠났다고 하는데 지금의 천관사(天官寺)는 곧 천관녀의 집터이다.
고려(高麗) 때 유명한 문인(文人) 이규보(李奎報)는 천관사로 놀러 갔다가 유신과 천관의 옛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절 이름 천관사 예부터 연 있더니
홀연 지난 일 듣고 한 번 슬퍼라
삐딱이 취한 공자 꽃 아래서 놀고
애원하는 미인 말 앞에서 우네
적토마 다정해서 오히려 길을 잃고
상노는 무슨 죄로 채찍을 받았더냐
다만 남은 것은 한 곡조 좋은 가사
휘영청 달빛 아래 만고에 전해지네
서현은 66세 때 김용춘(金龍春: 김춘추의 아버지)과 함께 낭비성(娘臂城: 지금의 충북 청주)전투에서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참살하고 1천여 명을 생포하여 고구려 정벌의 기초를 다졌으며, 김용춘 집안과의 결속(結束)을 강화하였다. 그 후 서현은 대량주(지금의 양산)도독, 삽량주총관을 역임하였으며,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신(庾信), 차남은 흠순(欽純), 장녀는 보희(寶姬), 차녀는 문희(文姬)였다. 문희는 김춘추에게 출가하여 무열왕비(武烈王妃)가 되어 문무대왕(文武大王)을 낳았으니 후세인들이 서현과 만명을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상징으로 추앙하였으며 신라 신(新)김씨(金氏) 가문의 기초를 닦았다.
(3) 인내와 극기(克己)가 낳은 명장(名將) 김유신
가락국(駕洛國) 수로왕의 13세손인 김유신(金庾信)은 서기 595년 진평왕(眞平王) 17년 충북 진천에서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하게 혈통(血統)을 따지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위험과 고난을 자진하여 도맡은 헌신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모진 고난과 풍상(風霜) 속에 삼국통일의 원훈(元勳)이 된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한다.
17세 때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략을 보고서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진천군 이월면에 있는 속칭 장수굴이라 불리는 중악산 석굴(石窟) 속에 들어가 목욕제계하고 경건하게 비법 체득을 하늘에 빌었다. 4일 만에 드디어 한 노인이 나타나 “여기는 독충(毒蟲)과 맹수가 많은 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홀로 왔느냐.”라고 묻자 김유신은 “저는 신라 사람인데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파 여기에 와서 신(神)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노인은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칭찬하며 방술의 비결이 담긴 책과 청룡검(靑龍劍)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이 보검에 영기(靈氣)가 서렸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보검으로 바위를 갈랐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이란 바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월성군 서면 금척리 남산에 있으며, 당시 용화향도(龍華香徒)들이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修鍊)하던 영험한 지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상한 수련과 고초를 딛고 우뚝 선 김유신에게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백석이란 고구려 자객(刺客)이 김유신을 죽이고자 화랑의 무리 속에 끼어들어 젊은 김유신을 유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음모를 알아차린 김유신이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백석을 사로잡았다. 김유신이 백석을 문초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高句麗)의 군신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의 도사(道師) 추남(秋南)의 화신(化身)이다. 국경에 물이 거꾸로 흐르므로 왕이 그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추남이 말하되 대왕의 부인이 음양(陰陽)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표정이 이와 같다 하매 대왕이 놀라 괴이히 여기고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하고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자고 제안하였다. 왕이 왕비의 제안을 받아들여 쥐 한 마리를 함(函) 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쥐인데 그 수가 8마리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말이 틀렸다 하며 죽이려 하니 추남이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했다. 곧 그의 목을 베고 함을 열어 쥐의 배를 가르니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었다. 그제야 왕은 추남의 말이 옳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백석을 보내 김유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은 이미 화랑으로 있던 때에도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唐)나라 고종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게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을 크게 꾸짖으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오나 그 왕은 영명하고 김유신 같은 출중한 장군이 있어 온 국민이 굳게 단결하여 가벼이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도 전해 오고 있다.
김유신은 효용(孝勇)이 절륜(絶倫)한 무인(武人)이기도 하지만 국가관과 민족관이 투철하여 당나라의 영토적 집착을 단호히 물리치고 감언이설(甘言利說)을 일축했다. 김유신은 일찍이 그 선대 때부터 가풍(家風)이 형성되었으며, 김유신 자신도 그 가훈(家訓)을 엄하게 지켰으며 이를 신라 국민정신과 화랑정신으로 승화시킨 일세의 경륜가(經綸家)였다. 가훈을 어긴 아들 원술(元述)을 끝내 용서하지 않고 부자의 연(緣)을 끊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과 가정에 대해 엄격한 그의 성품이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김유신은 백제(서기 660년)와 고구려(서기 668년)를 차례로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당시 신라의 품계(品階)에도 없는 벼슬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직위를 받고 서기 673년 78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김유신이 서거한 후 162년만인 42대 흥덕왕 10년(서기 835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으니, 인신(人臣)으로서 대왕(大王)에까지 오른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후대 조선(朝鮮)의 역대(歷代) 왕들은 흥무왕 김유신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며 다음과 같은 하교(下敎)를 내렸다.
태조(太祖) : 「흥무왕의 자손들이 평안히 지내느냐. 만일 흥무왕의 삼한(三韓) 통일의 공(功)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를 면치 못했으리라.」
성종(成宗) : 「흥무왕의 자손이 잘 지내느냐. 우리 조정(朝廷)이 무사하고 베개를 높이고 편안히 살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흥무왕의 덕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종(中宗) : 「신라 일등공신(一等功臣) 김유신의 자손은 비록 천한 집안에서 천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군대나 부역(負役)에 내보내면 그 고을 수령을 문책하리라.」
명종(明宗) : 「흥무왕 김유신 자손은 군적(軍籍)에 넣지 말고 삼가도록 하라.」
영조(英祖) : 「신라 일등공신 흥무왕 김유신 자손은 만만세(萬萬歲)토록 천역(賤役)에 나가지 않도록 하라.」
정조(正祖) : 「신라 공신 김유신의 자손이 각처에 흩어져서 파계(派系)를 많이 잃어서 징포(徵布)를 면치 못하니 슬픈 일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을 백세(百世)에 우대함이 옳으니 벼슬아치들은 군오(軍伍)의 역(役)에 편입시키지 말고 해조(該曹)에서 완문(完文)을 만들어 주도록 하라.」
철종(哲宗) : 「열성조수교(列聖朝受敎)에 의하여 신라 명현(名賢) 흥무왕 김유신의 자손에게는 군역과 잡역을 일체(一切) 시키지 말도록 하라.」
(4) 신라의 대당(對唐) 군사 외교가 김삼광(金三光)
김삼광은 신라 무열왕(武烈王) 2년(서기 655년) 김유신과 지소(智炤)부인 사이에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광은 10세가 갓 넘은 문무왕 6년(서기 666년) 내마(신라 17관등(官等) 중 11번째 위계(位階)) 한림을 수행원으로 하여 3년간 입당숙위(入唐宿衛)하였다. 숙위란 당(唐)나라 주변국가의 왕자(王子)들이 당의 조정에 머물면서 황실의 권위를 높여주는 의장대(儀仗隊)였으나, 사실은 인질적(人質的)인 요소를 지닌 대당(對唐)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이 후일 삼국통일의 외교적, 군사적 관문(關門)을 열어주어 통일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숙위는 원칙적으로 김씨 왕족(王族)에 한하여 그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고수했으나, 나중에 왕족 김씨를 포함하여 김유신계, 박씨계 등에게도 자격이 개방되었다. 삼광은 3대 숙위로 당(唐)나라에서 받은 관직(官職)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이었다. 1대와 2대 숙위는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과 그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이었다. 그런데 이들 3인이 실제로 당의 관직을 담당하고 백제, 고구려 정벌시에는 장군이 되어 삼국통일의 주도적(主導的) 역할을 다했으며, 국내정치 제1선에서 왕성한 정치적 업적을 남긴 바 있었다.
이러한 무장(武裝)으로서의 숙위의 주임무(主任務)는 백제, 고구려 정벌의 청병사(請兵使)였다. 2대 숙위였던 김인문은 직접 당 고종(高宗)에게 원병(援兵)을 요구하여 백제 정벌을 가능케 하였다. 김삼광 역시 고구려 정벌의 청병사로서 소임을 다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전략을 본국에 보고하여 실전(實戰)을 독려하고 그 전술을 이끌고 나갔던 것이다. 서기 668년 고구려 정벌 당시 삼광은 당군(唐軍)의 향도장으로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대동하고 당항진(黨項津: 경기 안산)으로 귀국하였다. 문무왕은 김인문을 영접사(迎接使)로 파견하여 이들을 맞이하였다.
당 고종은 삼광의 귀국에 앞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찬란한 문성이 해동의 하늘에 빛나도다
재능과 덕이 온전히 구비됨이어
그의 이름 장안에 떨쳤도다
삼천기의 군마 국경으로 약진하노라
당시 삼광은 와병중(臥病中)인 김유신을 대신하여 신라군을 이끈 김흠순,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5) 흥무왕행장록(興武王行狀錄)을 저술한 김장청(金長淸)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김유신전(傳) 말미에 ‘유신의 현손(玄孫)으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김창정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니, 지어낸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를 깍아 버리고 기록할만한 것만 취하여 전(傳)을 만든다’라고 기록하였다. 실로 장청의 〈개국공(開國公: 김유신)행장록(行狀錄)〉10권이 없었더라면 김유신장군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신비에 가까운 무패(無敗)의 전승기록이 온전하게 전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장청(長淸)은 김유신-삼광(三光)-윤중(允中)으로 이어지는 김유신가(家)의 적손(嫡孫)인 윤중의 손자였으나, 그의 벼슬은 고작 집사성(執事省)의 말직(末職)인 집사랑에 불과했다. 집사성은 왕정(王政)의 기밀사무(機密事務)에 관여하는 왕의 직속기관으로 집사중시를 우두머리로 하여 시랑 2인, 대사 2인, 그리고 집사랑 20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청이 『개국공행록(開國公行錄)』을 집필하게 된 것은 통일 이후 신라왕실로부터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김유신의 공훈(功勳)과 또 자신들이 소외되고, 배척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면서 김유신 행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해 김씨 세보(世譜)〉등에는 모두 장청이 김윤중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윤중의 손자로 되어 있고 아버지는 공백으로 남겨놓고 있다. 일설에는 윤중의 아들이 김융(金融)의 난(亂)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하기도 하고, 또 김융이 윤중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혜공왕(惠恭王) 때 김유신 묘(墓)에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미추왕릉(味鄒王陵)으로 이어지는 이변(異變)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김유신의 후손들에게 불가항력(不可抗力)의 큰 곡절이 있었던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가는 김유신의 손자 윤중, 윤문이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당(唐)의 요청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발해(渤海)를 공격했으나 폭설(暴雪)로 실패했다는 기록과 장청이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전락한 사실을 끝으로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장청의 개국공행장록이 없었던들 가락(駕洛)의 세계와 김유신장군의 통일위업과 위국충절, 그리고 인간 김유신의 면모가 제대로 전해졌을까. 장청(長淸)은 기록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참으로 값진 교훈을 남겼다.
(6) 한국 최초의 역술가 김암(金巖)
양왕(讓王) 이후 가락국 왕세계(王世系)를 보면 [삼국사기]는 구형(仇衡)-무력(武力)-서현(舒玄)-유신(庾信)-삼광(三光)-윤중(允中)-○○-장청(長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김암은 서손(庶孫)으로서 흥무왕 유신의 현손(玄孫)이니 장창과는 이복(異腹)형제이다.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서(方術書)를 공부하는데 호기심을 가졌으며, 소년시절에 이찬(伊湌)(신라 17관 등급 중에 둘째 위계(位階))이 됐다. 당나라에 들어가 음양가법(陰陽家法)을 습득하고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을 저술하여 스승에게 보였더니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한 지식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그 후로 감히 제자로 대우(待遇)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공왕(惠恭王)때 귀국하여 사천박사(천문을 맡아 보는 지금의 기상대)가 되었고 지금의 양산, 진주, 경기도 광주 등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패강진(浿江鎭: 평양)의 두상(頭上: 태수와 동위(同位)인 관직)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극진한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농무(農務)를 장려하고 여가에는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쳐 사람마다 익히도록 하였다.
평양의 두상(頭上)으로 있을 때 메뚜기 떼가 서쪽으로 패강(浿江: 대동강) 지경(地境)에 들어와 징그럽게 온 들판을 뒤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했다. 김암은 산위에 올라가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고 메뚜기가 다 죽어버리는 이적을 보여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혜공왕 15년 서기 779년에 왕명을 받들고 왜(倭: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왜왕(倭王)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했으나, 그 무렵 당(唐)나라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김암과 서로 만나서 매우 반가워하며 즐거워하였다. 왜인들은 비로소 김암이 당나라에도 알려진 유명인(有名人)임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은 삼국통일 후 8세기초인 33대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면서 윤중(允中: 흥무왕의 손자)을 대표로 하는 흥무왕계를 중앙정부에서 제거(除去)하였던 것이니, 8세기말 흥무왕계의 신원(伸寃)운동을 볼 때 김암의 왜국 사신 파견은 그에 대한 정치적 추방의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암은 우리나라 천문학(天文學)의 원조이며, 탁월한 천재(天才)임에도 관직은 늘 6두품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흥무왕계로서 정치활동을 한 마지막 인물이며 둔갑술과 음양가(陰陽家)로서 가장 탁월한 천재였다.
발췌, 편집 :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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