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Ⅲ. 삼현파(三賢派)의 유래(由來)
1. 중조(中祖) 관(管)
중조(中祖) 김관(金管)선생이 성장한 시대적 배경을 보면, 당시 고려(高麗)는 외침(外侵)으로 인하여 막심한 국난(國難)을 겪고 있는 때였다.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는 고종(高宗) 18년 서기 1931년부터 고종 46년 서기 1259년까지 30년간 전후(前後) 6차(次)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는 최대의 국난에 처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20여만 명의 인명을 빼앗겼으며 외적(外敵)이 지나간 곳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대병란(大兵亂)으로 정치. 경제. 사화. 문화 모든 면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문화재를 비롯하여 곳곳에 보존되어 온 우리의 보첩(譜牒)마저 소실되어 버려 선대부터 계통(系統)을 찾기에도 매우 어려운 실로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선생이 서기 1250년에 출생하였으니 10세 때 원의 침략이 끝난 셈이다.
선생은 고려 23대 고종 37년, 1250년 5월 5일에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 5색(色)의 무지개가 종일 공중에 비치었다고 한다. 선생은 48세(世) 김용직(金龍直: 초휘(初諱)는 용각(龍角)이며 벼슬은 사인(舍人)을 지냈다)의 아들로, 초휘(初諱: 처음 이름)는 관(館)이며 자(字)는 희범(希範), 호(號)는 정성(靖醒), 정성간(靖醒幹) 또는 분성공(盆城公),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김해 가락의 전통(傳統)에는 자는 중오(仲吾), 호는 정성(靖醒). 퇴당(退堂)으로 되어 있음] 고려조(高麗朝)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국자사(國子師: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스승)를 지내었고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휘(諱) 관파(管派)의 중조(中祖)이다.
원종(元宗) 7년 서기 1266년 17세 때 현량과(賢良科) 삼장지시(三場之試: 과거의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 시험)에 오르니 시관(試官)인 참지정사(參知政事) 김경손(金慶孫)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경(柳儆)이 특히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한 선생을 크게 칭찬하고 조정에 인재를 얻었다 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벼슬은 처음에 교서랑(校書郞: 정9품)이 되었다가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는데 이때 안향(安珦= 안유(安裕))을 만나 친교하게 되었다. 선생은 경전을 강마(講磨)하고 토론하여 고금치난(古今治亂)을 손에 쥔 듯 밝히니 안회헌(安晦軒)이 국가의 큰 재목이라 하여 더욱 경중(敬重)하였다.
원종(元宗) 10년 서기 1269년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 부자(父子)가 원(元)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고 원종을 폐하려 하자, 그는 송송례(宋松禮), 홍문사(洪文斯) 등과 더불어 임유무 일당(一黨)을 제거하고 원종을 보호했다.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적진(敵陣)에 잡혀있는 안회헌(安晦軒)선생에게 친서를 보내 대의(大義)를 지킬 것을 주장하니 안회헌선생이 크게 깨달아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에 왕은 감동하여 선생의 휘(諱) 관(館)을 음(音)이 같은 관(管)으로 사명(賜名)하였다. 또 완명(王命)으로 분성(盆城: 김해(金海)의 옛 이름)을 쌓았다.
충렬왕(忠烈王) 3년 서기 1277년에 판도사(版圖司) 좌랑(佐郞: 정5품)을 역임하고 감찰어사(監察御使: 조선조의 사헌부(司憲府)와 동일, 종6품)로 옮겼고, 다시 국자감(國子監) 사업(司業: 종4품)에 올라 안회헌선생과 함께 국법(國法)을 바로잡으니 권신(權臣)들이 감히 기를 펴지 못하므로 왕이 선생을 더욱 총애하여 어병(御屛: 병풍) 두 자리를 내리고 “경은 나의 팔다리이다. 팔다리가 불안하면 어찌할꼬. 짐은 병풍이 되어 간사(奸邪)한 것을 막을 것이니 경은 충성을 다해 나를 도우라”고 하였다. 이후로 이 동네를 어병동이라 불렀다.
왕이 불교에 미혹(迷惑)해서 만승회(萬僧會)를 베풀려고 하므로 선생은 여러 차례 그 부당함을 간(諫)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낙향(落鄕)하여(김해의 무릉산(武陵山)) 글을 지어 올렸다. 그 글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눈은 요괴를 부르고 성인(聖人)의 말은 복이 따르네. 간사와 정의가 뚜렷하니 유교(儒敎)는 인재를 기르거니와 부처는 사람이 아니로세”하였다. 왕이 마침내 만승회를 파하고 선생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성인으로 믿고 있는데 경이 믿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냐”고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다 취하되 나 홀로 깨어있다”고 말하니 왕이 옷깃을 여미고 정성간(靖醒幹)으로 호를 내렸다.
서기 1289년 10월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선생은 제학(提學: 종2품) 안회헌(安晦軒: 고려 충렬왕 때의 명신(名臣))과 함께 수행하여(2세 명회제공(明晦齊公)도 수행함) 연경(燕京)에 머물며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서 가져와 널리 반포하여 주자학(朱子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서기 1290년에 밀직사사(密直司使: 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軍機)를 맡는 관청, 종2품)에 제수(除授)되었다.
서기 1298년에 충선왕(忠宣王)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고, 서기 1301년 5월 도성(都城)에 큰 불이 나서 궁전으로 번지니 선생은 왕을 화염(火炎) 중에서 구출하였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4년 서기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억류될 때 선생도 또 수행하였는데 악양(岳陽: 중국의 지명)에서 국상(國喪: 충혜왕 승하)을 당하자, 선생은 왕을 대신하여 원나라에 머물기로 요청하니 원(元)나라 조정에서 그 충성에 감동하여 왕의 상여를 모시고 귀국하게 하였다.
선생은 왕에게 유교(儒敎)를 일으키고 학교를 세울 것을 간하였으며 국학(國學)이 부진하므로 중찬(中贊: 종1품) 안회헌(安晦軒)과 함께 상의하여 국고출납(國庫出納)과 노예제도(奴隸制度), 사역(使役)의 법칙 등을 정하여 백관(百官)들이 이를 익혀 스스로 출자(出資)하여 전각(殿閣)을 지어 성인의 영정을 모셨다.
뛰어난 경륜과 확고한 소신으로 진퇴(進退)를 분명히 했던선생은 충목왕(忠穆王) 1년 서기 1345년에 판도판서, 국자사를 역임한 뒤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종1품)에 올랐다. 왕이 궤장(几杖: 70세 이상의 1품관으로 요직(要職)을 맡고 있어 물러날 수 없는 신하(臣下)에게 왕이 하사(下賜)하던 안장과 지팡이), 약물, 의복 등을 내렸으나 동년(同年) 2월 19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인복(李仁復)을 보내어 벼슬과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리고 저소산(楮沼山)에 장지(葬地)를 내리니 이조년(李兆年), 권부(權溥), 우탁(禹倬), 이제현(李齊賢)이 7관(官) 12도(徒)를 거느리고 풍악을 갖추어 창원군 대산면 유등리(柳等里)에 예장(禮葬)하게 했으니, 오늘날의 창원시 대산면 유동이다. 사당(祠堂)은 저산서원(猪山書院)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公)의 묘비 뒷면의 기록에는 양자(養子)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대가락국 시조왕의 49세손(世孫)이다. 고려 충렬왕은 공이 금주(金州)가 관향(貫鄕)인 까닭으로 분성군주(盆城郡主: 분성은 김해의 옛 이름)로 내려주었고, 충선왕 2년 서기 1310년에 김해부(金海府)에 승격함에 따라 공이 분성에 적(籍)을 두고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셨다. 호는 정성(靖醒)이요 또 분성공(盆城公)이라 일컬었다.
공이 불교를 배척(排斥)하도록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무릉산(武陵山)에 은거(隱居)하여 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충렬왕 32년 서기 1306년에 안회헌(安晦軒: 안향(安珦))선생을 조상(弔喪)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왕이 어병(御屛)을 내렸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수행하여 돌아오고, 서기 1324년에 도성에 화재가 있어 공이 불속에 뛰어들어 왕을 구원(救援)하니 하늘이 갑자기 큰 비를 내려 불을 껐다.
또 공이 학교를 설립하고 유교를 일으킬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물러나 저복산(儲福山)에 은거하다가 조정에 변란(變亂)이 있음을 듣고 원나라에 들어가 전왕(前王)을 복위시켰다. 서기 1343년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억류될 때 수행하여 악양(岳陽)에 도착했을 때 국상(國喪)을 당하여 공이 왕을 대신하여 원나라에 머무를 것을 요청하니 원나라에서 공의 충성(忠誠)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충목왕 1년 서기 1345년 2월 19일에 별세하니 96세였다. 조정에서는 예관(禮官)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김해 저소산(楮沼山)에 장례 지냈다. 특별히 와판(瓦板)을 더하여 흙을 돋우어 분토(墳土)를 크게 하고 조정에서는 묘가 있는 동네에 비(碑)를 내려주어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예(禮)를 표하였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묘는 실전(失傳)되었다가 서기 1920년 봄에 편갈(片碣)을 발견하여 다시 영역(瑩域)을 쌓고 석물(石物)을 세우고 저산재(楮山齋)를 세워 9월 27일로 정하여 봉사(奉祀)한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나주임씨(羅州林氏)로 기일은 10월 2일이고 부친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임의충(林宜衷)이며, 묘는 합장(合葬)하다.」
선생의 후예(後裔) 중에 한국 역사상 대표적 효자(孝子)인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 해동(海東)의 직필사관(直筆史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 한 집안에서 삼현(三賢)이 배출되었다 하여 일명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라 하고 김관공(金管公)을 삼현파의 파조(派祖: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2. 2세(世) 문숙(文淑)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아들로 자는 경선(景善) 또는 아숙(雅淑)이고, 호는 명회재(明晦齋)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인 서기 1293년에 출생하여 어머니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문숙(文淑)은 일찍이 안회헌(安晦軒)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경덕재생(經德齋生)이 되었다. 충선왕 때 현량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가 한림원으로 옮겨서 칠재(七齋: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한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전(詩傳), 주례(周禮), 예기(禮記), 춘추(春秋), 병학(兵學) 등 7개 과목)에서 경서(經書)를 강독하니 재생(齋生)과 사우(士友)들이 즐겨 따랐다. 역동(易東) 우탁(禹倬),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 동암(東庵) 이진(李瑱),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등과 경전을 강마(講磨)하고 도의로 교유(交遊)하였고, 명도(明道: 북송(北宋)의 대유(大儒) 정호(程顥))선생의 역학(易學: 주역을 연구하는 학문)과 주자(朱子)의 신서(新書)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理致)에 통달하니 당시 제현(諸賢)들이 선생의 호를 명회(明晦)로 칭하였다. 부친 판서공(判書公)이 왕을 모시고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에는 배행(陪行)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판서공이 국상(國喪: 충혜왕(忠惠王)이 악양(岳陽)에서 승하)을 당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1345년에 별세하니, 선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상복(喪服)을 벋은 지 두어 달 만인 서기 1348년 4월 10일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경선(景善)이고, 호는 명회재(明晦齋)이다. 충렬왕 때인 서기 1293년에 출생하였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고향에서 천거(薦擧)하여 성균관 복은재생(服膺齋生: 칠재 중 예기(禮記)전공), 경덕재생(經德齋生: 칠재 중 시전(詩傳)전공)으로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기 않았다. 충목왕 때인 서기 1348년 4월 10일에 별세하였고, 묘는 저복산 선영하(先塋下)이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6품관 아내의 봉작) 서산유씨(瑞山柳氏)로 부친은 목사(牧使: 정3품)를 지낸 유방선(柳方善)이고, 조부는 정언(正言: 정6품)을 지낸 유기(柳沂)이고, 증조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정3품)를 지낸 유후(柳厚)이며, 문희공(文僖公) 유숙(柳淑)의 현손이다. 외조부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고성(固城) 이원(李原)이다. 병오년(丙午年) 8월 9일에 별세하였고 묘는 합장하였다.」
3. 3세(世) 항(伉)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손자이며, 2세 명회재(明晦齋) 김문숙(金文淑)의 아들이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인 서기 1326년 9월 28일에 출생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등제(登第)하여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 종5품)을 지냈으며, 신병으로 귀향(歸鄕)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정4품)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제수(除授)하니 왕에게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는 성학(聖學: 유학)을 숭상(崇尙)하고 선불(仙佛)을 배척(排斥)하면 국법이 잡히고 인륜도 바르게 될 것이니, 부역(負役)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유연(遊宴)을 금하고 사치를 끊어 몸소 시무(時務)를 살피면 나라가 저절로 부(富)하고 병사(兵士)도 저절로 강해질 것이니 선악(善惡)과 안위(安危)를 잘 분간(分揀)하소서” 하니 왕이 받아들여 후한 상을 내렸다.
스승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정3품)이 되어 경술(經術: 경학(經學), 경서(經書)에 관한 학문)이 높은 선비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등을 천거해 학관(學官)을 삼아 명륜당(明倫堂)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도교(道交)하게 되었고, 신돈(辛旽)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언(諫言)하다가 뜻을 거슬러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소미동(小微洞)에 은거(隱居)하였으며 이씨조선(李氏朝鮮)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이정(而正)이고 호는 둔옹(遯翁)이다.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은 도제고판관(都制鋯判官)을 지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승유(勝遊)하면서 별산군(鱉山郡: 청도)을 지나다가 소미동(小微洞) 삼성산(三省山)의 청수(淸遂: 맑고 그윽함)함을 보고 집 한 채를 지어 아들 서(湑)에게 먼저 이주하도록 명하고, 우왕(禑王) 8년 서기 1382년에 전 가족이 이거(移居)하였고, 그해 10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유명(遺命)에 의하여 김해부(金海府) 저복동 선영하(先塋下)에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옮겨 장사함)하였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고씨(高氏)로 동년(同年) 7월 17일 별세하였고, 부친은 학사(學士: 정4품)를 지낸 고지린(高知麟)이며 묘는 동원(同原)이다.」
4. 4세(世) 서(湑)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증손(曾孫)이며, 3세 둔옹(遯翁) 김항(金伉)의 아들이다. 자는 원윤(遠允)이고 호는 퇴평(退平)이다.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3년 서기 1342년 5월 3일에 출생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에게 수학하였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였다. 등제(登第)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 종6품)에 제수(除授)되어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백성들에게 크게 교화(敎化)가 되고 잘 다스려 이민(吏民)이 신군(神君)처럼 모셨고 청백리(淸白吏)로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선생은 서기 1380년 제야(除夜: 섣달 그믐날 밤) 꿈에 태학(太學=성균관)에 들렸는데 주자(朱子)가 소학(小學) 일부를 주면서 ‘장차 효자(孝子) 아들이 이 책을 알리리라’하였다. 그 후 14개월 만인 서기 1382년 2월에 과연 아들 극일(克一)을 낳았는데, 이분이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효자 절효(節孝)선생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원윤(遠允)이고 호는 퇴평(退平)이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 서기 1342년 5월 3일에 출생하였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재(宰: 지방장관을 뜻함, 현감(縣監))에 올랐다. 서기 1374년에 조정(朝廷)의 조짐(공민왕 시해(弑害))를 보고 은퇴하여 전리(田里: 고향)에 살았다.
서기 1375년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소인(小人)들을 배척(排斥)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일으켰으며, 서기 1380년 제야(除夜)의 꿈에 태학(太學)에 들렸는데 주자(朱子)가 소학(小學) 일부를 주면서 ‘장차 아들이 이 책을 알리리라’하였다. 그 후 14일 만에 아들 극일(克一)을 낳았다.
조선태조(朝鮮太祖) 1394년 4월 4일에 포은선생을 조상(弔喪)하고 오늘 길에 상주(尙州)에 들렸더니 제유(諸儒)들이 고려조(高麗朝)의 부흥책(復興策)을 묻기에 주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오성(五星)이 모인 것으로 답하였다(기운(氣運)이 새 왕조(王朝)에게 기울었다는 뜻). 태종조(太宗朝)에 성익대좌리공신(誠翊戴佐理功臣)으로 추천되었고 분성군(盆城君)에 봉군(封君)되니 그 일이 회맹록(會盟錄)에 기록되어 있다. 의흥현감에서 부임하여 신(神)이 보듯 모든 것을 감식(鑑識)하여 교화(敎化)가 행하여 진 지 수개월에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은 성품과 도량(度量)이 순후(淳厚: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움)하여 봉록(俸祿)으로 영광을 삼지 않고 초야(草野)로 돌아와서는 덕(德)을 심고 업보(業報)를 끼치며 자제들을 지극히 교훈시키고, 날마다 정관(整冠)하고 단정히 앉아 거문고와 책을 즐겼으며, 혹은 산천지간(山川之間)에 읊조리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였다.
세종(世宗)때인 서기 1420년 10월 12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는 나복산(籮䈏山) 호점혈(虎占穴) 갑좌(甲坐)이며, 서기 1842년에 백동사(栢洞祠)에 모셔 제향(祭享)한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정3품 당상관(堂上官) 아내의 봉작) 밀양박씨(密陽朴氏)로 병신(丙申)년 9월 9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은 중서내령(中書內令: 종1품)을 지낸 박천봉(朴天鳳)이다. 묘는 쌍분(雙墳)의 부좌(祔左:합사)이며 호랑이의 가르침을 따라 토석(土石)을 쌓아 올려 방분(方墳: 모양이 네모진 무덤, 고분(古墳) 분류의 한 가지)을 만들었다.
4세(世) 위(渭)
중조 문정공(文貞公) 김관(金管)의 증손(曾孫)이며, 4세 현감공(縣監公) 김서(金湑)의 동생이다. 관직(官職)은 양지현감(陽智縣監: 용인(龍仁))을 지냈고, 별세하니 묘는 양지 황사동(黃紗洞) 임좌(壬坐)이다. 배위는 숙인(淑人) 조씨(趙氏)로 묘는 동폄(同窆: 합장)이다.
5. 삼현파(三賢派)의 유래(由來)와 분지(分枝)
삼현파는 원래 판도판서공(版圖版書公) 휘(諱) 관파(管派)라 하는데 그 연유는 삼현파의 중조(中祖)인 김관선생이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版書: 호조(戶曹)의 전 이름, 판서는 오늘날의 장관)를 지냈으므로 그 벼슬 이름을 따서 지은 파명(派名)이다.
그런데 그 후손(後孫) 중에서 삼현(三賢)이 나왔다 하여 삼현파라고도 하는데, 이는 금녕군(金寧君) 목경파(牧卿派)를 그 후손들이 주로 서울(한양)에서 살았다 하여 지명(地名)을 따서 경파(京派)라 하기도 하고, 또 감무공(監務公) 익경파(益卿派)를 그 후손 중에서 4군(四君: 학천군(鶴川君), 학성군(鶴城君), 해성군(海城君), 학림군(鶴林君))이 나왔으므로 사군파(四君派)라 하는 것과 같다.
삼현은 중조(中祖)로부터 5세 절효선생(節孝先生) 김극일(金克一), 7세 문민공(文愍公) 탁영선생(濯纓先生) 김일손(金馹孫), 8세 삼족당선생(三足堂先生) 김대유(金大有)의 세 분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유래(由來)는 조선 18대 현종(顯宗)과 22대 정조(正祖)가 한 집안에서 4대간에 걸쳐 조손숙질(祖孫叔姪)의 삼현인이 나온 것은 고래(古來)로 드문 일이라 하여 삼현인(三賢人)이라 지칭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삼현파는 4세 김서(金湑)와 김위(金渭) 형제에서부터 분지(分枝)되기 시작하여 6세에 와서 절효선생(節孝先生)의 여섯 형제로부터 6개 파(派)로 분지된다.
즉, 장남 김건(金健)은 군수공(郡守公) 건파(健派), 2남 김맹(金孟)은 집의공(執義公) 맹파(孟派) 또는 참판공(參判公) 맹파(孟派), 3남 김용(金勇)은 한림공(翰林公) 용파(勇派), 4남 김순(金順)은 진사공(進士公) 순파(順派), 5남 김인(金靭)은 녹사공(綠事公) 인파(靭派), 6남 김현(金鉉)은 진의공(進義公) 현파(鉉派) 등 6개 파와 4세 김위(金渭)의 현감공(縣監公) 위파(渭派)이다.
발췌, 편집 :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김해김씨(金海金氏) 서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계보해설(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