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나의 가계/IV. 삼현선생

Ⅳ. 삼현선생(三賢先生)

도널드 Kim 2009. 10. 20. 10:53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Ⅳ. 삼현선생(三賢先生)

 

1. 5세(世) 극일(克一) : 절효선생(節孝先生)

   

절효선생 김극일(金克一)은 중조(中祖) 김관(金管)의 현손(玄孫: 5세(世))으로 한국 역사상 대표적인 효자(孝子)이다. 고려(高麗) 32대 우왕(禑王) 8년, 서기 1382년 청도군 이서면 삼성산하(三聖山下) 소미동(少微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현감공(縣監公) 김서(金湑)의 꿈에 주자(朱子)가 현몽(現夢)하여 소학(小學)을 주었는데, 그 후 14개월 만에 극일이 출생할 때 동네 앞 시내에서 구름 속에 용(龍)이 보이며 7일 동안 상서로운 일이 있었으므로 마음 이름을 운계리(雲溪里)라 하였다. 극일은 천성적으로 효심(孝心)이 지극하여 어릴 때부터 언제나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효성을 다했다.

15세 때 고려말(高麗末)의 대 유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3개월 후 야은선생에게 말씀드리기를 “학업은 비록 늦게도 이룰 수 있으나 부모는 한번 늙으면 다시는 젊어지지 않으니 청하건대 집에 돌아가 부모를 봉양(奉養)하게 해 주십시오.”하니 선생께서 칭찬하며 허락하였다 한다. 

선생의 효행은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극일(金克一)은 김해(金海)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도롭더니 어머니를 위하여 부스럼을 빨며, 아버지를 위하여 대변을 맛보며, 시묘(侍墓)를 여섯 해를 하더니 호랑이가 무덤 곁에 와 새끼 치거늘 제사(祭祀)하고 남은 것을 먹게 하되 집짐승 치듯 하더라. 아버지의 첩(妾) 둘이 있었는데 섬기기를 아버지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하더니 죽으므로 기년상(朞年喪: 1년)을 입으니라. 천순(天順) 갑신(甲申)에 말하기를 홍문(紅門)세니라」 

또,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은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선생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내 보니 김절효(金節孝)는 대인(大人)의 자격일세. 요순(堯舜)과 같은 마음씨에 주무왕(周武王)의 효성이라. 못가에 잉어가 뛰놀고 마을에 구름 어려 증자(曾子)의 봉양으로 검루(黔婁)의 지성(知性)이니 길짐승도 감화되고 범이 와서 여막을 호위하였도다. 행실(行實)은 삼강록(三綱錄)에 실리었고 어진 덕(德)은 일백 사람에게 전해지네. 효행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하여 춘추만대(春秋萬代)로 향화(香火)를 끊지 말지어다. 그 자손에게 연년세세(年年世世)로 부역(負役)을 시키지 말고 대대로 후한 상을 내리게 하라.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이 자손에게 세금 외에는 일체(一切) 잡부금을 부과하지 말라.」

 

삼강행실(三綱行實) 편찬시(編讚詩)는 다음과 같다.

 

「6년을 여막(廬幕)살이 하매 효성(孝誠)이 순수하여 묘소 옆에 젖먹이 범을 길들이게 하였네. 치질을 빨고 이질을 맛보니 신명이 내려 보아 짐승의 무리로도 지극한 인(仁)에 감동하였네. 아버지 사랑하는 깊은 심정 오래도록 쇠퇴하지 않으매, 서모(庶母)에게까지 정성을 미루어 1년복(服)을 입었네. 하늘이 범을 길들이게 하여 순전한 효행(孝行) 밝히었으니 만고(萬古)에 떳떳한 인륜(人倫) 규범을 지으리라.」

 

선생은 항상 방안을 청소하시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해 꿇어앉아 소학(小學)을 강독(講讀)하고 자제(子弟)들을 가르치실 때 반드시 장공예(張公藝: 중국 산동성 사람, 9대(代)가 한 집에서 살았다 함)를 들어 본받게 하였으니 자제들이 한결같이 효자들이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큼 돈독하였으니 세인(世人)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슬하에 6남을 두었는데 장남 건공(健公)은 영광(靈光) 군수(郡守)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군수공(郡守公)이라 하여 후손들은 군수공 건파(健派)라 하고, 2남 맹공(孟公)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집의공(執義公)이라 하며 그 후손들은 집의공 맹파(孟派)라 하고, 3남 용공(勇公)은 한림원(翰林院) 교리(校理)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한림공(翰林公)이라 하여 그 후손들은 한림공 용파(勇派)라 한다.

또, 4남 순공(順公)은 진사(進士)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진사공(進士公)이라 하여 그 후손들은 진사공 순파(順派)라 하고, 5남 인공(靭公)은 녹사(綠事)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녹사공(綠事公)이라 하여 그 후손들은 녹사공 인파(靭派)라 하고, 6남 현공(鉉公)은 진의(眞義)를 지냈기 때문에 통칭 진의공(眞義公)이라 하여 그 후손들은 진의공 현파(鉉派)로 분지(分枝)된다.

진의공(眞義公)은 아버지와 다섯째 형인 인공(靭公)이 중병을 앓게 되자 네 개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드리고 또 뱀을 구하여 약을 만들어드려 모두 완쾌되었다고 한다.

세조(世祖) 2년 서기 1456년 6월 사육신(死六臣)의 화(禍)를 당하자 선생은 개탄하여 식음(食飮)을 끊고 앓다가 그해 11월에 75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묘(墓)는 청도군 각북면(角北面)에 모셨졌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字)는 용협(用協), 호(號)는 절암(節菴) 또는 서은(書隱)이다. 고려 우왕(禑王) 8년 2월 8일에 출생하여 9세 때에 홍분방(紅粉榜)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모친이 등창을 앓았을 때 빨아 낫게 하였고, 부친이 이질을 앓았을 때 대변을 맛보아 시약(試藥)하면서 낫게 하였으며, 어느 날은 아버지께서 잉어 안주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하늘에 7일을 빌었더니 하늘이 갑자기 비를 내려 와룡산(臥龍山) 끝이 패여 열 길이나 되는 못이 되어 잉어가 번식하니 날마다 낚시질 하여 잉어를 잡아 공양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낚시를 던져도 잡히지 않으니 모두 공(公)의 지극한 효성(孝誠)의 소치(所致)라고 칭송하였다.

15세 때에 모친의 명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35세 때에 내간(內艱: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하게 우니 호랑이가 장지(葬地)를 점지해 주었다. 묘소 옆에 시묘(侍墓)살이 하면서 집에서 30리(里) 길을 아침 저녁 다니면서 두 서모(庶母) 받들기를 지성으로 하고, 39세 때에 부친(의흥(義興) 현감(縣監))상을 당하여 호점혈(虎占穴)에 장사지냈다. 피눈물로 여묘(廬墓)살이 할 때 호랑이가 와서 호위해 주면 제물(祭物)의 남은 음식으로 가축을 기르듯 길렀고, 읍혈(泣血) 3년상(喪)을 마쳤다. 또 호랑이가 공이 죽어서 묻힐 묘지를 점지하여 주었다.

날마다 소학(小學)을 강독하여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 항상 장공예를 칭찬하여 본받게 하고 세종(世宗) 16년 서기 1434년에 삼강록(三綱錄)이란 책을 찬집하고 학문을 닦은 일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정5품)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세조(世祖) 2년 서기 1456년 11월 2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림(儒林)들이 선영(先塋) 아래 호점혈 간좌(艮坐)에 장사지내고 사시(私諡: 학덕이 높은 선비에게 일가나 제자들이 올리는 시호)로 절효(節孝)라고 했다. 군수(郡守) 이기수(李掎修)가 효행을 나라에 보고하고 후임 군수 조금(趙嶔)이 또 보고하여, 세조 10년 서기 1464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를 추증(追贈)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치제(致祭: 나라에서 내리는 제사)하였다.

2남 맹(孟)이 용인에서 와서 실록을 수찬하고 아들 일손(馹孫)을 佔畢齊(점필제) 김종직(金宗直)선생에게 보내어 효문비명(孝門碑銘)을 청하여 건립하니 대제학(大提學) 조경(趙絅)이 발문(跋文)을 쓰고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정6품) 김좌명(金佐明)이 글씨를 쓰고 제학(提學: 종2품)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서기 1578년에 자계서원(紫溪書院)을 건립하여 절효선생, 탁영선생, 삼족당선생의 세 분을 아울러 배향(配享)하고 현종(顯宗)이 서기 1660년에 사액(賜額: 왕이 사원(祠院) 등에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扁額)을 내림)하여 치제(致祭)하고 임술년(壬戌年)에 유림의 여론으로 운계사(雲溪祠)를 다시 지어 춘추(春秋)로 제사지낸다.

배위(配位: 부부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에 대한 경칭)는 숙인(淑人: 정3품관 아내의 봉작)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서기 1463년 12월 2일 8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부친은 한성(漢城) 판윤(判尹: 정2품)을 지내신 이연(李湅)이고 묘는 부군(府君)과 쌍분이며 비석이 있다.」

 

2. 7세(世) 일손(馹孫) : 탁영선생(濯纓先生) 

 

탁영선생 김일손(金馹孫)은 중조(中祖) 김관(金管)의 7세손(世孫)으로, 집의공(執義公) 김맹(金孟)의 아들이며 절효선생의 손자(孫子)이다.

선생은 세조(世祖) 10년 서기 1464년 정월 7일 오시(午時)에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雲溪里) 소미동(少微洞: 오늘날의 이서면(伊西面) 서원동(書院洞))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일손(馹孫)이요 자는 계운(溪雲: 처음의 자는 순우(舜佑))이다. 호는 탁영(濯纓) 또는 이다(伊堂) 또는 운계은사(雲溪隱士)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또는 영귀학인(咏歸學人) 또는 와룡초부(臥龍樵夫) 또는 반계거사(磻溪居士)이고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운계리는 일찍이 증조부 둔옹(遯翁) 김항(金伉)이 정포은(鄭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늘 승유(勝遊)하던 곳인데, 선생이 태어나기 며칠 전부터 운계리 청계 위에 자기(紫氣)가 무지개처럼 뻗치고 그 서색(瑞色)이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한다.

부친 남계공(南溪公) 김맹(金孟)이 경기도 용인(龍仁) 이씨(李氏) 사돈집에서 며칠을 지내는데, 어느 날 저녁 꿈에 하늘에서 내려온 준마(駿馬) 한 마리가 푸른 구름을 타고 공(公)의 품안으로 뛰어들었으므로 장자는 준손(駿孫: 준마 駿), 둘째는 기손(驥孫: 천리마 驥), 셋째는 일손(馹孫: 역마 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3형제 중에서 선생은 출생 전에 이조(異兆)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면모(面貌)가 단정하고 굉후(宏厚)하며 비범(非凡)하였다.

5세 때 천자문(千字文)에 능통(能通)하였고 기억력이 매우 좋았으며, 어릴 때에도 그릇된 일을 보면 참지 못하였다. 서기 1471년 8세 때 부친 남계공이 예문관봉교(藝文官奉敎: 정7품)로 부임하자 선생은 모친인 용인이씨(龍仁李氏) 친정인 용인 압고리(鴨皐里) 외가(外家)에서 지내면서 비로소 소학을 배웠다. 이때 선생은 옥수정사(玉樹精舍)에서 형제와 더불어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 옥수정사의 현액(懸額: 현판)은 김시습(金時習: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이 써 주었다. 지금은 정사는 없어졌으나 이곳 사람들은 그 장소를 탁영대(濯纓臺)라 부르며 뒷산을 탁영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선생과 동종(同宗)인 금산공(琴山公: 구손(龜孫), 한림(翰林), 대사간(大司諫))과 함께 용인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포곡면(浦谷面)에 한림대(翰林臺)가 있고 늘 넘어 다녔다는 탁영치(濯纓峙)가 있다.

서기 1478년 15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였다. 같은 해 3월에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부인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종2품) 우극관(禹克寬)의 딸이며,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의 6세손이며 형조참의(刑曹參議: 정3품) 이양(李讓)의 외손(外孫)이다.

16세 때 중형(仲兄)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한성부(漢城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다. 17세 때 부친 남계공이 노환(老患)으로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종4품)을 사임하고 동창공(東窓公),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전 가족이 귀향(歸鄕)하였다. 9월에는 밀양(密陽)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을 찾아가 그 문하(門下)가 되어 수학하게 되었는데 동문(同門)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목계(木溪) 강혼(姜渾) 등과 이때부터 도의(道義)로서 친교하게 되었다.

1481년 18세 때 추강(秋江) 남효온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서 동유(同遊)하였고 원주 주천산(酒泉山)에 가서 원자허(元子虛=원호(元昊):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선생을 찾아뵙고 돌아 왔다. 19세 때 동창(同窓), 매헌(梅軒) 두 형이 함께 정시(庭試: 과거(科擧)의 하나로 나라에 경사(慶事)나 중대사(重大事)가 있을 때 대궐 안마당에서 보던 시험) 에 壯次(장원과 차석)로 급제(及第)하였다. 선생은 이때 형(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응시(應試)하지 않았다 한다. 20세 때인 서기 1483년 9월 11일 부친 남계공(南溪公)의 상(喪)을 당했다.

1486년 23세 때 영남좌도(嶺南左道) 감시(監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의 초시(初試)에서 양장(兩場: 초.종장(初.終場))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생원(生員)에 장원(壯元)으로, 진사(進士)에 제 2(第二)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식년정시(式年庭試)의 문과 초시(初試)의 3장(場)을 모두 장원하였고 복시(覆試)에도 장원, 전시(殿試)에서는 제 2로 합격하였다. 고관(考官)인 대제학(大提學: 정2품) 서거정(徐居正)은 ‘김일손은 비범한 사람으로 그의 언론(言論)은 삼엄(森嚴)하고 추상(秋霜)같다. 문장(文章)은 왕양대해(汪洋大海)요 거칠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해 인재(人材)를 얻었도다’라고 극찬하였다.

같은 해 11월 승문원(承文院) 무공랑(務功郞: 정7품)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 종9품)로 관직(官職)에 들어가서 12월에 정자(正字: 정9품)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이때 동창공(東窓公)이 중시(重試: 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시험을 보게 하는 승진시험)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정5품)에 오르고 매헌공(梅軒公)이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이 되어 3형제가 함께 벼슬을 하니 세인(世人)이 김씨 3주(珠)라 하였다.

1487년 24세 때 홍문관정자(弘文館 正字) 겸 경연전경(慶筵典經: 정9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이배(移拜)되고, 4월에 안인(安人) 우씨(禹氏)가 별세하였다. 9월에는 노모(老母)를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싶다고 간청(걸양(乞養))하여 진주목학(晉州牧學)의 교수(敎授)로 제배(除拜)되어 약 2년 동안 진주에 머물게 되었다. 진주학관(晉州學館)은 영남우도(嶺南右道)의 상학(上學)기관이기 때문에 나이 들고 청렴한(청직년부(淸職年富)) 상직(上職)에 있는 문신(文臣)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는 상례(常例)를 깨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부임하게 되었다. 서기 1488년 25세 때 진주목사(晉州牧使: 정3품) 경대소(慶大素)를 비롯한 문인 등 30여 명이 촉석루(矗石樓)에 모여 진양수계(晉陽修稧: 문인명사(文人名士)들끼리 모은 계)를 맺고 서(序)를 지었다.

다음은 진양지(晉陽誌)의 기록이다. 

「김일손이 진주학관에 교수로 왔다. 솔선하여 규율이 엄하고 예의에 밝으며 의리(義理)와 성(誠)과 경(敬)을 근본으로 삼으니 배우는 자가 모두 따랐다. 진주목사 경대소와 더불어 유생(儒生) 등 32명이 난정고사(蘭亭故事)를 추모하여 촉석루에서 난정수계(蘭亭修契)를 결성하니 풍류가 문아(文雅)하고 덕업(德業)이 떨쳐 문무(文武) 인사들이 왕사와 더불어 교류(交流)를 가졌다.」 

선생은 유생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法道)는 반드시 엄하게 하고 예법(禮法)은 반드시 명확하게 하고 의리(義理)에 힘쓰고 성경(誠敬: 존성(存誠)과 거경(居敬))을 깨우치게 하고 학문을 강문(講問)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하여 교도(敎導)의 책무를 다하였다. 독서(讀書)의 순서는 주자가 정한 주자성규(朱子成規)에 따르도록 하여 먼저 소학(小學)을 다 읽고, 다음에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읽은 다음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순응(順應)해 따랐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말하기를 ‘계운(溪雲)은 교수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敎學)에 임했다’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선생의 출생지인 운계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세웠다(현재의 자계서원(紫溪書院) 경내(境內)).

서기 1489년 26세 때 3월에 선교랑(宣敎郞: 종6품) 예문관검영(藝文館檢閱: 정9품) 겸 경연전경(經筵典經),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4월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두류산(頭流山: 현재의 지리산(智異山))을 탐방하여 속두류록(續頭流錄)을 지었다. 이 속두류록은 현전(現傳)하는 수필(隨筆)문학의 백미(白眉)이며, 속두류록으로 표제(表題)된 것은 스승인 점필재(佔畢齋)선생이 17년전에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썼기 때문에 그에 계속하여 썼다는 뜻이다. 7월에는 목천(木川)에서 예안김씨(禮安金氏)를 다시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9월에 성종(成宗)에게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으로 올리는 상소문(上疏文))로 치도(治道) 12항을 올리니, 

1. 군주(君主)는 학문에 부지런할 일이며

2. 놀이를 좋아하는 욕심을 절제(節制)하고

3. 명령을 간결(簡潔)하게 할 것이며

4. 궁중(宮中) 안을 엄숙하게 하며

5. 간(揀)하는 일을 용납할 것이며

6. 헤프게 쓰는 일을 배격(排擊)하고

7. 충성함과 간사(奸邪)함을 판별해서 행하며

8. 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振興)케 하며

9.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며

10. 요사스러운 미신(迷信)을 막으며

11. 지방(地方)의 장관을 가려서 쓰며

12. 백성의 헐벗고 굶주림을 보살피라고 열거(列擧)하였다.

 

선생은 인품과 문명(文名)이 뛰어나 학문을 좋아하는 성종의 총애(寵愛)를 받아 31세 때까지 8년간 청요(淸要)의 직(職)에 있으면서 경연(經筵) 자리에서 성종에게 고금(古今)의 시정득실(時政得失)과 사관기사(史官記事)의 규(規)를 논하여, 무릇 역사는 사실(事實)을 기록함이 귀한 것이니 옛 역사를 상고(上考)하면 임금의 표정(表情)도 쓰고 있는데 군주의 용색(容色)을 바로 보지 못하면 어찌 그 참모습을 기록하오리까. 중국의 사관(史官)은 붓을 들고 제왕(帝王)의 좌우(左右)에 서 있거늘 우리나라 사관은 엎드려 기사(記事)함이 심히 불가한 일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성종은 이를 옳게 여겨 그로부터 사관들이 바로 앉아서 기록하게 하였다. 또 성종은 일찍이 경연 자리에서 참찬관(參贊官: 정2품) 조위(曺偉)에게 ‘김일손이 문학에 구우(俱優)하고 재기(才器)가 겸비하여 기질(氣質)과 언론(言論)이 가히 조정의 책(責)이 될 만하다. 장차 크게 쓰고자 하니 지금은 연소(年少)하여 예기(銳氣)가 준엄하므로 마땅히 노성(老成)을 기다려 보상(輔相: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하리라’하였다. 성종은 또 선생에게 두 번이나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休暇)를 주어 독서하게 함)를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1월에는 왕명으로 요동(遼東) 질정관(質正官)에 제수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서기 1490년 27세 때 3월에 통선랑(通善郞: 정5품),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정7품) 겸 검열(檢閱)에 제수되고 곧이어 사관(史館: 춘추관의 옛 이름)에 입직(入直)하여 사초(史草)를 닦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하였다. 5월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서 동유(同遊)하였고 약현당(約賢堂: 해인사(海印寺)에 있음)에서 5일간 강학(講學)하고 약현당기(約賢堂記)를 지었다.

7월에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정7품) 겸 경연사경(經筵司經: 정7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세자(世子)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 정7품)에 오르고, 8월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종6품),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檢討官: 정6품), 춘추관기사관에 오르고, 10월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6품)에 제수되고, 11월에는 본직(本職)으로 진하사(陳賀使: 중국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파견하는 사절)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또 명나라에 갔다.

서기 1491년 28세 때 3월에 명나라에서 돌아와 명나라에서 얻은 제사경적(諸史經籍)과 소학집설(小學集設)을 조정에 상정(上呈)하였고, 성종은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포(印布)하게 하니 그로부터 소학집설이 국내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저명한 학자 정유(程愈: 소학집설(小學集設) 찬술(撰述)), 주전(周銓) 등과 교유(交遊)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선생의 뛰어난 문장을 일러 동국(東國: 조선(朝鮮))의 한창여(韓昌黎) 퇴지(退之)라고 극찬하였으며 이로부터 국내외에 선생의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졌다.

3월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6품)에 제수됨에 따라 선생은 정언(正言)이란 이름으로 부정언(不正言)을 할 수 없다 하고 차자(箚子)로 다음 네 가지를 아뢰었다.

1. 왕의 면예학(勉叡學: 면학)에 대해서는 정심성의(正心誠意: 대학(大學)의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2. 조정을 바르게 함에 대해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신배를 멀리하는(친현원간(親賢遠奸)) 계책을 말하였으며,

3. 동궁(東宮)의 양육(養育)을 돕는 일(보양동궁(輔養東宮))은 관관(官官)을 가려 써서 국본(國本: 세자(世子))을 튼튼히 하는 길을 논하였고,

4. 인재를 양성(작성인재(作成人才))하는 일은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성종은 이에 대해 따뜻하게 비답(批答)하고 칭찬하며 차례대로 시행하리라 하였다.

 

8월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 정6품)에 제수되고 겸하여 교수강목청(校讐綱目廳) 일을 맡게 되었다. 9월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고 10월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3품)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정5품)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 소능(昭陵)의 위호(位號)회복 상소문을 올렸다. 11월에는 김해에 가서 시조왕릉(始祖王陵)을 참예(參詣)하고 회노당기(會老堂記)를 지었다.

서기 1492년 29세 때 3월에 다시 이조좌랑으로 소명되었으나 상소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되었다. 7월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 종3품), 홍문관부교리(副校理: 종5품),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독관(試讀官: 정5품), 춘추관기주관(記注官: 정5품), 예문관봉교(奉敎: 정7품)에 올랐다. 동년 9월 16일 중형(仲兄) 매헌공(梅軒公)이 별세하였다. 9월에 사간원헌납(獻納: 정5품)으로 제수되어 차자(箚子)를 올려 이극동(李克墩), 성준(成俊) 등이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며 반대세력을 배척하여 조정을 분열시키므로 과감히 이를 논핵(論劾)하였다.

서기 1493년 30세 때 정월에 홍문관교리(정5품)에 올라 반유어사(頒諭御使: 조정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파견하는 어사)의 소임을 맡아 각지의 민정(民情)을 살폈다. 3월에는 하동(河東)을 지나다가 섬진강변(蟾津江邊)에 유거(幽居)하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방문하여 하루를 유숙하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5월에 사헌부지평(持平: 정5품)에 배명(拜命)되고 곧 이어 통훈(通訓)대부(정3품 당상관), 홍문관교리에 배명되었다가, 7월에는 수(守: 자신의 품계(品階)보다 실제 관직이 높은 경우 수(守)를 붙이고, 반대로 자신의 품계보다 실제 관직이 낮은 직을 겸할 경우 행(行)을 붙인다) 예문관응교(應敎: 정4품)로 사가독서하게 되었다. 

 

서기 1494년 31세 때 2월에 사간원헌납(獻納)에 제수되니 천재시변(天災時變)을 상소하였고, 3월에 병조정랑(正郞: 정4품)에 이배되고, 5월에 다시 홍문관교리, 지제교, 수(守) 예문관응교(應敎) 등의 문신 겸 선전관(宣傳官)에 배명(拜命)되고, 9월에는 이조정랑, 지제교 겸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양관(兩館;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응교, 경연시강관(侍講官: 정4품), 춘추관편수관(編修官: 정3품), 춘방(春坊: 세자시강원)필선(弼善: 정4품)을 겸하게 되었고, 12월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여 어온(御醞: 임금이 내리는 술)이 내렸고 동월 24일 성종(成宗)이 승하(昇遐)하였다. 

서기 1495년 32세 때 연산(燕山)이 왕위에 오르니 조정에서는 군소(群小)가 난정(亂政)을 이루었고 한 사람도 바르게 진언(陳言)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혼자서 계사10조(戒辭10條) 등을 상소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상소로 자핵(自劾: 자기의 죄(罪)를 스스로 탄핵)하고 직명을 깎아 고향 청도(淸道)로 내려갔다. 그 후 몇 번 부름을 받았으나 모친(母親)의 병환도 있고 해서 응하지 않았다. 12월에 이조판서 어세겸(魚世謙)이 난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을 사간원헌납(獻納)으로 천거하므로 다시 입조(入朝)하게 되었다. 선생은 곧 난정의 주동인물(主動人物)인 임사홍(任士洪), 윤필상(尹弼商), 이극돈(李克墩) 등의 간사함을 논핵(論劾)하였다. 또 연산초(燕山初)의 난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구절절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경륜을 내용으로 한 26조목의 단독(單獨) 상소문을 올렸다. 서기 1496년 33세 때 정월에 간료(諫僚)들과 더불어 소릉복호(昭陵復號) 상소를 두 차례 올렸으나 윤허(允許)되지 않으므로 사임(辭任)하였고, 3월에 다시 이조정랑 겸 지제교에 제수되었으나 친질(親疾)로 취임하지 않았는데, 동월(同月) 29일 모친 정부인(貞夫人) 용인이씨(龍仁李氏)가 별세하였다. 서기 1498년 35세 때 6월에 모친상(母親喪)의 복(腹)을 마치고 김해에 가서 성묘하고 함양(咸陽)으로 가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선생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을 때 이극돈(李克墩), 성준(成俊) 등이 새로운 분당(分黨)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한 바 있었고, 또 이 무렵 조정에서는 성종(成宗)의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춘추관사(春秋館事)당상관이 되어 있어 선생이 쓴 사초(史草)를 보니 자신이 전라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성종이 상(喪: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을 당했음에도 향화(香火)는 올리지 않고 장흥(長興)의 기생과 놀러 다녔다는 것이다. 또 다음에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의제는 중국 초(楚)나라 회왕(懷王)인데 김종직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항우가 회왕을 죽인 고사(故事)를 비유한 글이라 해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됨)으로 선생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생각하고 실록청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유자광(柳子光)을 시켜 문제를 삼았다. 유자광은 일찍이 함양에 놀이 갔다가 시(詩) 한 수를 지어 그곳 학사루(學士樓)에 달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가서 보고 ‘유자광이 감히 시를 현판에 달았다는 말인가’하고 철거시켰다. 유자광은 분하였으나 김종직이 살아있을 때에는 도리어 찾아가서 문안드리고 문하생(門下生)이 될 것을 간청하는 등 아첨을 하였지만, 이제 와서는 보복의 선두에 선 것이다. 연산(燕山)은 왕으로서 체통을 잃은 분방한 그의 행동을 늘 간섭해 오던 사림파(士林派)를 귀찮게 여겨오다가 마침내 많은 사류(士類)가 화(禍)를 입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7월 5일 선생은 함양에서 정여창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고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에 의해 피체(被逮)되었고, 7월 12일 궁중(宮中) 수문당(修文堂)으로 압송(押送)되어 연산이 친국(親鞫)하였다.

연산: “조의제문을 수록하면서 충분(忠憤)함을 느낀다고 하였는가.”

탁영: “선왕(先王)의 선악과 신자(臣子)의 충(忠)함과 간사함을 기록하여 권장시키고 징계함은 후세(後世)에 거울로 삼고자 하는 일입니다. 조의제문은 신(臣)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것인데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의 일에 깨달은 바가 있어 사초에 수록하여 공론(公論)을 천재(千載)에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연산: “앞서 상소하여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위하고자 요청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탁영: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니 조종(祖宗)께서 왕씨(王氏)를 의절(義絶)하지 않고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9대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을 건립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자손까지 수령(首領: 목숨)을 보존토록 하였으니 이는 다 조정의 미덕(美德)으로 의당(宜當) 만세에 계승해야 할 일이옵니다.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昭陵) 복위(復位) 요청은 군상(君上)께서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옵니다.”  

연산(燕山)은 선생의 답(答)을 듣고 이어 사초(史草)에 수록할 때 동의(同意)한 사람을 물었으나 선생은 끝까지 혼자서 한 일이라 말했을 뿐 다른 사람을 끌어넣지 않았다. 조의제문은 성종(成宗)이 조위(曺偉)에게 명하여 김종직의 문집(文集)을 찬집(撰集)하게 할 때 이미 문집 첫머리에 수록되어 성종도 잘 알고 있었던 글이다.

1차 국문(鞠問)이 있을 후 5일 후에 2차 국문이 연산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극돈, 유자광이 맡았다. 그러나 선생은 전후(前後)의 사리(事理)가 정연한 답으로 첫 번째 말과 한 마디의 틀림도 없이 되풀이하였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맞대고 모의(謀議) 끝에 김종직은 세조(世祖)를 헐뜯었으니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연산에게 쉽게 풀이하여 알리려고 한 것은 김종직의 가르침이라 하여 그 제자 김일손을 대역(大逆)의 죄(罪)로 다스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짰다.  

26일까지 계속 신문(訊問)한 뒤 연산은 다음과 같이 선포(宣布)하였다.

「김종직은 화심(禍心)을 품고 음(陰)으로 붕당(朋黨)의 부류와 손을 잡아 흉모(凶謀)하고자 한지 날이 오래 되었노라. 그래서 그는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弑害)한 일을 빙자하여 무자(文字)에 드러내어 선왕(先王)을 비방하였으니....... 대역(大逆)으로 논단(論斷)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을 뒤에 관(棺)을 꺼내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극형)하고, 그 무리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간악(奸惡)한 붕당을 이뤄 동성상제(同聲相濟: 같은 소리로 서로 도움)하여 그 글을 찬양(讚揚)하되 충분(忠憤)이 움직여지는 바라고 사초에 적어 불후(不朽)의 문자를 남기고자 했으니 그 허물이 김종직과 아울러 같으므로 능지처참(陵遲處斬: 죽인 뒤에 다시 사지(四肢)를 토막 내어 각지(各地)에 돌려 보이는 극형)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김일손이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鎌) 등과 함께 선왕의 무근(無根)한 사실을 허위로 날조(捏造)하여 서로 고하고 사(史)에까지 적었으므로 이목(李穆), 허반(許磐)도 같이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姜鎌)은 곤장 1백대를 치고 집 재산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 지극히 먼 변방)으로 내쳐 노비(奴婢)로 삼노라. 그리고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茂豊副正) 총(摠: 태종의 증손(曾孫)) 등은 허물이 난언(亂言)을 범했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임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으므로 더불어 곤장 1백대를 쳐서 3천리 밖으로 내쫒고(정여창은 함북 종성(鐘城)에 귀양 갔다가 이어 형(刑)을 받음) 이종준(李宗準), 최단(崔漙), 이원(李黿), 이주(李冑),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姜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전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이루고 피차 칭송하였으며 혹은 나라의 정사를 기의(譏議: 헐뜯고 비난함)하고 시사(時事)를 헐뜯었으므로 임희재는 곤장 1백대를 쳐서 3천리 밖으로 쫒고, 이주(李冑)는 곤장 1백대를 쳐서 극변으로 부처(付處: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는 형벌)하고, 이종준, 최단,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곤장 80대를 쳐서 원방(遠方)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內親: 마음속으로 친하게 여김)자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 봉화를 올리는 일을 맡던 군사)이나 정료(庭燎: 밤중에 입궐하는 신하를 위해 대궐 뜰에서 화롯불을 피우는 일)의 일에 배정하였고(김굉필은 평북 희천(熙川)으로 귀양 감), 수사관(修史官)이 사초를 보고도 빨리 주달(奏達)하지 않았으므로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罷職)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시켰다.(이하 생략)」 

선생은 서기 1498년 7월 27일 정오에 능지처사(陵遲處死)되고 말았다. 선생이 형(刑)을 받던 그날 장안에는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풍을 몰고 와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고향 청도(淸道)에서는 운계(雲溪)의 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으로 흘렀다. 또 하늘과 땅은 선생의 죽음을 예고나 하듯 이에 앞서 경상도에서는 큰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있었다. 즉 선생이 함양(咸陽)에서 의금부(義禁府)에 의해 피체(被逮)되기 하루 전 경상감찰사(監察使) 김심(金諶)은 조정에 제출한 그의 사직서에서 “삼가 아뢰옵니다. 금 6월 11일, 13일, 20일에 도내(道內) 열 일곱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간혹 하루에 두 차례도 하고 네 차례도 하였습니다. 신(臣)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요(妖)란 망령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초래하는 바이온데... 이번에 재변(災變)이 있었는데도 신이 뻔뻔스럽게도 직책을 감당하고 있음은 실로 감연(敢然)히 할 수 없사온즉 청하옵건대 신의 본직(本職)을 갈으시어 천견(天譴: 하늘의 꾸짖음)에 보응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연산(燕山)은 자신을 두고 비유(比喩)라도 되는 듯 “이는 반드시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소치일 것이다...”라고 전교하였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동창공(東窓公)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을 하시다가 연산군 초(初)에 걸양(乞養)하여 고향 가까운 함양군수로 내려와 있었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남원(南原)으로 귀양 갔고, 선생의 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는 목천(木川)에서 비보(悲報)를 듣고 10여 일이나 단식(斷食)하며 여러 번 가사(假死)상태에 빠졌다. 그 후 3년간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조석(朝夕)으로 곡제(哭祭)하더니 연산 6년 7월 27일, 3년 탈복(脫)의 날에 옷을 갈아입고 바르게 앉아 자결(自決)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 지 6년이 지나서 연산군 10년 서기 1504년 3월에 또 한 번 큰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죽음에 관한 일로 형(刑)의 집행이 1년 이상이나 계속된 대옥사(大獄事)로 이른바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이다.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성종 10년 서기 1479년에 폐출(廢黜)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원래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와 부인 신씨(申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연산군의 생모(生母)이다. 성종 4년 서기 1473년에 숙의(淑儀)로 봉해진 후 서기 1476년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그러나 질투가 몹시 심하여 여러 가지 부덕(不德)한 일을 많이 했고, 서기 1477년에는 비상(砒霜)으로 왕과 후궁을 독살(毒殺)하려는 혐의(嫌疑)가 발각되어 왕과 모후(母后)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더욱 받게 되었다. 그 뒤에 서기 1479년에는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진노를 사서, 서기 1479년 성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든 뒤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원자(元子:뒤의 연산군)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되므로 나라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관청에서 생활비 일체를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이는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고, 원자가 성장하면서 인심(人心)도 폐비 윤씨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에 성종 13년 서기 1482년 8월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의 대신(大臣), 육조(六曹), 대간(臺諫)을 모아 의논하게 한 다음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사사(賜死)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와 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그 후 서기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게 된 후,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功臣)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沒收)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런 계제에 폐비윤씨의 생모인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과 사사된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密告)하여 일이 크게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 사화로 선생은 부관참시형(剖棺斬屍刑)을 당했으니 두 번이나 화를 입은 셈이다. 정여창은 그 해 4월에 유배지(流配地)에서 죽었는데 같이 부관참시형을 당했고,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사약(賜藥)을 받았고 남효은, 조위 등 많은 유신들이 부관참시형 또는 갖가지 중형(重刑)을 당하였다.

선생의 묘(墓)는 화를 입은 후 양주(楊州) 석교원(石橋原)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중종(中宗) 원년(元年) 서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복관(伸寃復官)되어 10월에 목천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하여 종자(從子) 대장(大壯)이 묘주(廟主)로서 봉사(奉祀)하였고, 서기 1508년에 청도 수야산(水也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선생은 중종반정으로 그 해 9월에 신원복관되고, 중종 7년 서기 1512년 9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直提學) 겸 예문관은교(應敎), 경연시강관(侍講官), 춘추관편수관(編修官)으로 추증(追贈)되고, 현종(顯宗) 원년 서기 1660년 3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都承旨) 겸 경연참찬관(參贊官), 춘추관수선관(修撰官), 예문관직제학(直提學), 상서원 정(正)으로 추증되고, 순조(純祖) 30년 서기 1830년 11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知)경연 의금부사(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大提學),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손좌빈객(世孫左賓客),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가증(加贈)되었다. 

서기 1834년 6월에 문민(文愍)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는데, 「학문을 많이 듣고 많이 알며 문장이 넓고 빛나시어 글월문(文)자와, 죽음에 백성들의 울분과 참혹함을 당하여 슬플 민(愍)자」로 하사(下賜)받았다.

선생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화(禍)를 입었지만 뛰어난 대문장가(大文章家)이며, 선비의 도리를 다하여 사관(史官)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지켰으므로 조정에서는 절사신(節史臣)이라 경칭(敬稱)하였고, 전국의 유림(儒林)들은 선생의 숭고(崇高)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도처에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향(祭享)을 받들며 추모하고 있다. 중종(中宗) 13년 서기 1518년에 선생이 수학하던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청도 유림에서 자계사(紫溪祠)로 하여 제향해 오다가, 선조(宣祖) 11년 서기 1578년 11월에 영남 사림이 사우(祠宇)를 중수하여 서원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서기 1608년에 절효(節孝), 삼족당(三足堂) 양선생(兩先生)을 병향(並享)하였다.  

현종(顯宗) 원년 서기 1660년에 자계서원으로 사액(賜額)이 내려져 도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 서기 1676년에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사액이 내려졌다. 이 두 서원을 비롯하여 청도의 차산(車山)과 석강(石崗), 함양의 청계(靑溪), 남원의 사동(社洞), 김제의 벽산(碧山), 익산의 동산(東山), 광주의 두암(斗岩)과 임계(臨溪)서원 등이 있고, 사(祠)로는 순천의 옥산(玉山), 무주의 연화(蓮花)와 유천(裕川), 여천의 화산(華山), 부여의 부풍(扶風), 함평의 유음(柳陰), 광주의 장열(壯烈), 순창의 왕산(王山), 화순의 숭의(崇義), 하동의 덕은사(德隱祠) 등이 있다.

 

 

선생의 높은 학덕(學德)과 충직(忠直)한 기개(氣槪)를 칭송하는 유생(儒生)들의 변(辯)은 다음과 같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군(君)은 글을 짓는데 능하지 않은 바가 없고 나의 학문을 전할 사람은 군 외에는 없다.」

정유(程愈), 주전(周銓)-중국의 저명한 학자: 「동국(東國: 조선(朝鮮))의 한창여(韓昌黎) 퇴지(退之)다.」퇴지는 당(唐). 송(宋) 8대가(大家) 중의 한사람)

허봉(許篈): 해동야사(海東野史)에서 「김계운(金季雲)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이다. 그러나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서 화를 당하였다.」

신영희(辛永禧):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서 「김일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상소문(上疏文)과 차자(箚子)는 글이 크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그가 나라 일을 의논하는 것과 사람의 시비(是非)를 말하는 것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았다.」

남명(南冥) 조식(曹植): 「살아있을 때는 권세(權勢)를 꺾을 만한 절기(節氣)가 있었고, 죽은 후에는 하늘을 뚫을 만한 억울하고 원통함이 있었다. 문장(文章)은 강과 바다처럼 넓고 성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은 희세(稀世)의 재(材)요 묘당(廟堂: 조정)의 기(器)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탁영문집(濯瓔文集) 서문에서 「선생은 우주간기(宇宙間氣)로 태어났고 문장절행(文章節行)은 당대의 명문이다.」

지정(止亭) 남곤(南袞): 「세상에 다시 탁영선생과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니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3. 8세(世) 대유(大有) : 삼족당선생(三足堂先生)

 

   

삼족당선생 김대유(金大有)는 중조(中祖) 김관(金管)의 8세손(世孫)으로, 직제학공(直提學公) 김준손(金駿孫)의 장자(長子)이며 탁영(濯纓)선생의 장질(長姪)이다. 선생은 성화(成化) 15년 서기 1479년에 청도군 이서면 운계리(雲溪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자(字)는 천우(天祐),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천성(天性)이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총명(聰明)하여 4.5세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한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8세 때 모친인 고씨(高氏)가 별세하므로 숙부(叔父)인 탁영선생이 일찍이 어머니 여윔을 측은(惻隱)하게 생각하여 각별히 사랑하며 소학을 가르쳤다. 후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일두선생도 그 총명하고 착함을 늘 칭찬하였다고 한다.

서기 1498년 20세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친 직제학공(直提學公)과 함께 호남으로 귀양 갔다가 서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9년 만에 풀려나왔다. 이듬해 서기 150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삼족당선생행장(行狀)에는 정시(庭試)에 장원(壯元) 합격한 것으로 기록됨) 동년 12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 여묘(廬墓)하였고, 서기 1509년에 계비(繼妣) 남원양씨(南原梁氏)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하였다.

중종(中宗) 13년 서기 1518년에 전국에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한 선비를 천거(薦擧)하게 되는데, 여러 관아(官衙)에서 선생을 천거하는 추천장(推薦狀)의 글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관찰사(觀察使) 김안국(金安國)은 「아버지 등창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고,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한 번도 웃지 않고 흙막 속에서 시묘(侍墓)하였고, 형제들에게 좋은 농토(農土)를 다 나누어 주면서 자기는 박토(薄土)를 가졌으며, 숙(叔)의 신주(神主)를 지성으로 모셨다.」고 하였고,

승정원(承政院)에서는 「효도와 우애(友愛)가 지극하고 기운(氣運)과 도량(度量)이 탁월한 사람이며 지식(知識)이 밝고 넓다.」고 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효(孝)스럽고 우애(友愛)함이 하늘에서 내리었다.」고 하였고,

사관(四館)에서는 「기품(氣品)이 초범(超凡)하고 식도(識度)가 환하게 밝다.」고 하였고,

고향(故鄕)에서는 「아버지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고 부모상에 3년이나 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며, 한 번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벼슬은 처음에 참봉(參奉: 종9품)에 제수되고 이어서 서기 1518년에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 종7품)에 옮기었으나 곧 사임하고, 본군(本郡) 동쪽에 창고를 만들어 세곡(歲穀)을 저장토록 하여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중종(中宗) 14년 서기 1519년에 현량과(賢良科)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典籍: 정6품), 호조좌랑(戶曹佐郞: 정6품), 춘추관기사관(記事官: 정6품)을 겸하였고, 사간원정언(正言: 정6품)에 이배(移排)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으니, 다시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하므로 부임하여 혜정(惠政)을 베풀어 치적(治績)이 많아 고을을 다스린 지 3개월 만에 덕화가행(德化嘉行: 덕으로 교화하여 선행함)하여 백성들이 신명(神明)처럼 모셨다.

같은 해 서기 1519년 11월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실각(失脚)하자 현량과도 폐과(廢科)되어 선생은 난세를 피하여 청도 금곡(金谷)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정자(亭子: 삼족당(三足堂))을 짓고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독하고 낚시와 사냥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살았다.

인종(仁宗) 1년 서기 1545년에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조정에서 홍패(紅牌: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리는 증서)가 내리므로 선생은 소명(召命)에 응(應)하여 대구까지 갔다가 병을 핑계로 청도에 되돌아왔다. 그때 부름 받은 선비들은 모두 나라의 부름에 달려갔으나 선생과 오직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의 시의(時宜)에 맞는 용단(勇斷)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한 것은 절사신(節史臣) 탁영의 직필(直筆) 못지않은 용기로 후세에 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명종(明宗) 7년 서기 1552년 3월 2일에 삼족당 정자(亭子)에서 74세의 일기로 별세하니 묘(墓)는 정자의 북쪽 금곡산 에 장례하였다.  

선조(宣祖) 1년 서기 1568년 군수(郡守) 이의경(李宜慶)이 선생이 본 고을 백성들에게 베푼 은덕이 크다고 하여 본군(本郡) 동쪽 사창(社倉) 옆에 사당을 지어 박소요(朴逍遙)선생과 함께 제향(祭享)하였고, 선조(宣祖) 41년 서기 1608년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중건(重建)하여 절효선생, 탁영선생과 함께 배향(配享)하였고, 광해군(光海君) 12년 서기 1620년에 우연서원(愚淵書院)을 세워 선생과 박소요(朴逍遙)선생, 곽경재(郭警齋)선생을 향사(享祀)하였고, 인조(仁祖) 원년 서기 1623년에 박종주(朴宗冑)가 선암(仙岩)에 사당을 옮겨 세웠고, 현종(顯宗) 6년 서기 1665년에 홍문관응교(應敎: 정4품)에 추증(追贈)되었다. 또 헌종(憲宗) 14년 서기 1848년에 남원(南原)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향사하였다. 선생을 모신 사당은 청도 자계(紫溪)서원을 비롯하여 장수 사동(社洞)서원, 지도(智島) 연계사(蓮溪祠), 익산 동산(東山)서원, 승주 송천사(松川祠) 등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선생의 성품(性品)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선생은 서실(書室)에서 홀로 가끔 장가(長歌) 만무(慢舞: 마음 내키는 대로 추는 춤)하였는데 가인(家人)들이 그 뜻을 측량하지 못했다. 사냥을 한 후에는 크고 작은 것만 서로 비교해 보고 고기는 먹지 않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기 1544년 사냥하다가 중종(中宗)의 승하(昇遐) 부음(訃音)을 듣고 새매 여섯 마리를 풀어 날려주었다. 좋은 농토(農土)와 제전(祭田) 등은 모두 아우인 대장(大壯)에게 주어 탁영선생을 봉사(奉祀)케 하고 박토(薄土)를 가지고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돌아가신 후에도 자제(子弟)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게 하였다. 

선생의 호를 삼족당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로 아려져있다, 남명 조식이 찬(撰)한 김대유전(金大有傳)에는 「공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이가 60이 지났으니 수(壽)에 족하고, 사마시(司馬試)와 천과(薦科)에 올라 대성(臺省: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의 총칭)을 역임하고 현인(縣印)도 찼으니 영(榮)도 족하고, 조석(朝夕)의 공궤(供饋: 음식을 줌)에 주육(酒肉)이 걷히지 않으니 식(食)도 족하다. 그러니 나의 호를 삼족당이라 하리라.」하였고, 또 문인 소암(小庵) 노수(盧遂)의 삼족당기문(記文)과 대동보(大同譜)에는 「삼족(三足)이란 시냇물과 산이 아름다워 족하고, 시원한 바람과 달이 풍족하고, 음아(吟哦: 시를 읊음)하는 것이 풍족(豊足)하도다.」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학자들은 선생의 인품과 식견(識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 그가 찬(撰)한 삼족당서(三足堂序)에서 「주인 선생은 상송(霜松)과 같이 결백(潔白)한 지조(志操)요, 수월(水月)같이 청명한 회포(懷抱)이네, 충효(忠孝)의 도리는 소년시절에 다하였고, 인지(仁智: 자애롭고 지혜가 뛰어남)의 취미는 만년(晩年)의 성벽(性癖)이 되었네.」

남명(南冥) 조식(曺植): 김대유전에서 「나는 일찍이 남의 인격을 評하지 않으나 오로지 공께서는 천하에 제일가는 선비의 자품(資品)을 가지셨다. 그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과 도량은 널리 사람을 용서하고 글과 역사에 능한 선비였으며 굳세고 힘찬 모습으로 활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호걸(豪傑)이었다.」

송계(松溪)선생: 삼족당행장에서 「헌헌(軒軒: 뛰어난 모양)한 대장부(大丈夫)로서 굳세고 힘찬 기상(氣像)이 뛰어났다.」

박병제(朴甁齊)선생: 「모든 행하는 일에 있어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 「안으로는 경학(經學)에 밝고 밖으로는 엄(嚴)하고 깊으며 굳세다.」

권남강(權南岡)선생: 맑고 깨끗하게 흐르는 시냇가에서 두루 노시며 마음을 즐기고 공작(公爵), 후작(侯爵)을 눌러 보는 뜻을 가지셨다.」

김학사(金鶴沙)선생: 「선생은 우주간(宇宙間)에 계시지 않으나 만고(萬古)에 그 이름은 맑고 깨끗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성종(成宗) 서기 1479년에 출생하여 중종(中宗) 정유(丁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유(乙酉)년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다. 이조(吏曹)의 추천장에는 「효(孝)스럽고 우애(友愛)함이 하늘이 내었다.」라고 되어 있고, 사관(四館)의 추천장에는 「기품(氣品)이 초범(超凡)하고 식도(識度)가 환하게 밝다.」라고 하였으며, 고향에서의 추천에서는 「아버지의 종기를 입으로 빨았으며 부모상(父母喪)에 3년이나 이를 들어 내보이지 않았으며 한 번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경술(經術)과 재행(才行)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 제현(諸賢)의 추천을 받았다. 벼슬이 사관원정언(正言: 정6품)에 이르고, 후에 칠원(漆原)의 수령(首領: 현감(縣監))이 되어 치적(治績)과 교화(敎化)가 뛰어나 수령이 된지 3개월 만에 남녀(男女)가 길을 따로하였다.(즉 그만큼 남녀가 유별(有別)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간신(奸臣)들이 등용되어 일을 하니 공은 사임(辭任)하고, 세상을 피해 초야(草野)에 묻혀 운문(雲門)의 우연(愚淵) 위에 집을 짓고 낚시와 사냥하는 것으로 취미로 삼고 유유자득(悠悠自得: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아니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삶)해서 문달(聞達: 명성이 높아짐)을 구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살아도 조금도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없었다. 남명 조식선생과 더불어 날마다 경서와 성리학을 강독하고 도회(韜晦: 재지(才知)나 학식(學識)을 감춤) 자락(自樂)하며 당호(堂號)를 삼족(三足)이라 하였으니 삼족이란 시냇물과 산이 아름다워 풍족하고, 시원한 바람과 달이 풍족하며, 음아(吟哦)하는 것이 풍족하다는 것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삼족당의 서문을 지었다.

가화(家禍)를 깊이 조심(操心)하여 문집(文集)을 모두 불태워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는데, 그 후에 유고(遺稿)를 주워 모아 책 한권을 겨우 만들었으나 인쇄하지는 않았다. 농사(農事)와 집을 나눌 때 제전(祭田)과 묘직이 등을 모두 아우인 대장(大壯)에게 주어 탁영선생을 봉사(奉祀)하게 하고 박토(薄土)를 가지고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가정(嘉靖) 임오(壬午)년 서기 1552년 2월 74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군(郡)의 동쪽 우연(愚淵) 북쪽 금곡산에 간좌(艮坐)이다. 묘비명(墓碑銘)은 남명 조식선생이 찬하였다. 현종(顯宗) 을사(乙巳)년 서기 1665년에 홍문관응교(應敎: 정4품)에 추증되고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을유(乙酉)년 4월 9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은 현감(縣監) 이량(李樑)으로 경은(耕隱)선생의 후손이다. 묘는 부군(夫君)과 쌍분(雙墳)이며 묘비가 있다.」

 

 

 

 

 

 

발췌, 편집 :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김해김씨(金海金氏) 서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계보해설(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